체코의 작곡가, 음악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1824년~)
에드바르트 베네시 출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인 에드바르트 베네시. (~1875년)
현존하는 한성순보 가운데 마지막 호수인 제36호 발행. 창간호부터 이 호까지 남은 지면은 국내 관청 소식과 번역 외신을 함께 전했던 개화기 신문의 편집과 내용을 보여주는 자료. 실제 발행은 이후에도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최종 발행호는 미확인.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자오선 회의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경도 0도의 국제 기준으로 권고하는 결의안이 찬성 22표, 반대 1표, 기권 2표로 통과됨. 최종 회의 결의문은 10월 22일에 서명되었으며, 이 표결은 국제 항해와 지도 제작의 기준 통일을 촉진함.
19세기까지 국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본초자오선을 사용하는 일이 많아 국제 항해와 측량, 지도 제작에 불편이 발생함. 1884년 국제 자오선 회의는 공통 본초자오선과 세계일의 기준을 논의하는 국제적 조정의 장이었음.
그리니치 본초자오선 결의안은 10월 13일 표결로 채택되었고, 10월 22일 서명된 최종 문서에 포함됨. 회의가 각국의 시간대를 일괄 설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
갑신정변 과정에서 박문국 사옥과 활자·인쇄시설이 소실되면서 한성순보 발행 중단. 창간 약 1년 만에 신문 제작의 물적 기반을 잃은 사건으로, 정치적 격변이 정부의 정보·출판 사업에 직접 영향을 준 사례. 이후 인쇄시설과 인력을 다시 갖추어 1886년 한성주보로 신문 간행을 재개.
조직노동직능연맹이 1886년 5월 1일부터 하루 8시간 노동을 실현하자는 목표를 채택. 법률상 제한만으로 실제 노동시간이 줄지 않던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공동행동 시점을 정한 결정.
조선 정부와 선교의사 알렌이 참여한 광혜원 개원. 오늘날 세브란스병원이 창립의 기점으로 삼는 사건.
헤르만 호트 출생
독일의 군인 헤르만 호트. (~1971년)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칭
광혜원의 이름을 제중원으로 변경. 1904년 세브란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의 병원 명칭.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 (1802년~)
이풍한 출생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 이풍한. (~1950년)
파스퇴르 연구진의 조제프 마이스터 광견병 노출 후 예방접종
광견병이 의심되는 개에게 여러 차례 물린 아홉 살 조제프 마이스터에게 예방접종을 시작한 사건. 의사 자크조제프 그랑셰가 파스퇴르 연구진의 백신을 투여했으며, 열흘에 걸친 접종 뒤 아이가 발병하지 않은 결과. 이미 증상이 나타난 광견병을 치료한 사례가 아니라, 노출과 발병 사이의 시간을 이용한 예방의 가능성을 보여 준 전환점.
지석영, 『우두신설』 저술
지석영이 종두 지식과 시술 경험을 바탕으로 『우두신설』을 저술함. 상·하 2권 1책으로, 제너의 우두종법 발견과 종두법 시행, 한역 종두서, 우두 치료법, 두묘 제조·보존법, 종우 사양법과 채장법 등을 정리한 저술. 조선에서 간행된 최초의 종두서이자 우두법의 지식과 기술을 체계화한 문헌.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돌아온 뒤 건청궁이 왕과 왕비의 주요 거처가 됨. 화재로 소실된 강녕전·교태전 등 침전의 복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생활과 집무의 중심 역할을 맡음.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성당에서 첫 미사 거행
지하성당 성 요셉 경당에서 첫 미사를 거행함.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예배 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한 단계.
한성순보가 중단된 뒤 재건된 박문국에서 《한성주보》를 창간하여 정부의 신문 간행 사업을 계승. 열흘 간격의 순보에서 주간 발행으로 전환하고, 순한문 위주의 지면에 국한문 혼용과 한글 기사를 함께 수록. 상공업 종사자의 구독과 광고 참여도 장려하여 독자층 확대를 시도. 이후 재정난과 신문대금 미납 등이 겹치면서 1888년 7월 발행 종료.
파스퇴르의 예방접종 성과 보고와 연구소 설립 운동
파스퇴르가 광견병 예방접종을 받은 수백 명의 경과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보고한 사건. 접종을 원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찾아오면서 지속적인 진료와 연구를 위한 전담 기관의 필요성이 부각된 상황. 뒤이어 연구소 설립 계획과 국제 모금으로 이어진 예방의학 제도화 과정.
제중원 의학교의 의학교육 시작
제중원에서 선발된 학생 16명을 대상으로 서양의학 교육 시작. 진료와 의료인 양성을 함께 수행하는 기반 형성.
폴란드의 철학자 브와디스와프 타타르키에비치.(~198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