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주에 우두국 설치
조선 정부가 전라도 전주성 안에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고 공식 종두를 시행함. 지석영이 우두법 보급 활동을 이어 가는 가운데, 우두법이 개인적 시술을 넘어 지방 행정과 결합한 초기 사례. 조선에서 국가가 인정한 종두 시행의 출발점.
조선 정부가 전라도 전주성 안에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고 공식 종두를 시행함. 지석영이 우두법 보급 활동을 이어 가는 가운데, 우두법이 개인적 시술을 넘어 지방 행정과 결합한 초기 사례. 조선에서 국가가 인정한 종두 시행의 출발점.
1882년 6월 공포된 일본은행조례에 따라 일본은행이 10월 10일 영업을 시작함. 메이지 정부가 통화와 신용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중앙은행 체제가 실제 운영 단계에 들어선 날로, 일본은행권 발행은 이후 1885년에 시작됨.
1882~1883년 국제극지년을 통해 여러 나라가 극지 관측소와 공동 관측활동을 운영한 국제협력의 이정표. 기상관측과 함께 지자기·대기전기·해양·빙하 등 관련 지구과학 관측을 결합하여, 고위도 자료가 부족했던 세계 관측망을 보완한 시도.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가 설계한 트리부나가 완성되면서 《다비드》를 위한 전용 전시 환경이 마련됨. 1873년 이전 후 약 9년 동안 임시 보호 구조 안에 있던 작품이 완성된 공간에서 전시될 수 있게 되었음.
천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조각을 중심에 둔 공간 구성이 작품 감상의 일부가 됨. 광장의 정치적 장소를 떠난 원작은 미술관 관람 동선과 관객의 시선을 이끄는 중심 작품으로 자리 잡음.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에서 공공기관을 시찰하고 여러 인사와 교류하면서 대중 계몽을 위한 신문 발행을 구상.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을 받아 신문 제작을 도울 일본인들을 데리고 귀국. 이후 한성부판윤으로서 신문 간행을 추진하고 유길준에게 협조를 요청하면서 한성순보 창간의 인적·실무적 기반을 마련.
1882년 주민투표로 승인된 통행료 폐지가 시행되어 이리 운하를 포함한 뉴욕주 운하의 기존 통행료 징수가 끝남. 철도 등 다른 운송수단과의 경쟁으로 운하의 화물 수송이 압박받던 상황에서 나온 조치였음.
이는 운하 자체의 폐쇄가 아니라 운영·재원 방식의 변화였음. 주정부는 이용료 수입 대신 공공 재정을 통해 유지·보수를 뒷받침하며 수운의 경쟁력을 지키려 했음.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 고종이 왕명으로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조선의 정식 국기로 제정·공포함.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으니 팔도와 사도에 알려 사용하게 하자'고 아뢰자 윤허하여 전국에 반포됨. 태극기가 개인의 사용을 넘어 국가가 공인한 공식 국기로 자리 잡은 출발점.
체코의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 (~1923년)
프랑스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 (1832년~)
조선 정부가 신문과 서적을 간행할 박문국의 설치를 결정한 날로, 음력 고종 20년 7월 15일에 해당. 동문학 장교 김만식이 통리아문의 신문 발행 규정에 근거하여 중단된 사업을 다시 추진. 김인식 등 실무 인력과 일본인 고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참여하고 저동에 사무실·인쇄소를 마련하여, 그해 한성순보 창간을 뒷받침할 조직과 제작 기반을 구축.
조선 정부의 박문국이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를 창간. 열흘마다 발행한다는 의미의 순보로, 한문을 사용하고 정부 소식뿐 아니라 외국 정세와 정치·법률·과학·기술 지식도 소개. 창간사인 「순보서」에서 국내외 정보를 널리 전하고 외국 문물을 분별하여 수용한다는 취지를 제시. 관청 배포와 일반인 구독을 함께 운영했으나, 한문 해독 능력과 비용·유통망의 제약 속에 독자 확대에는 한계.
1880년대 초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장마르탱 샤르코의 연구 환경에 참여해 최면과 히스테리 현상을 연구함. 샤르코 학파는 최면을 히스테리와 연결된 신경학적 현상으로 설명했고, 비네도 초기에는 이 해석을 지지하며 샤를 페레 등과 관련 실험을 수행함.
이 시기의 연구는 훗날 비네가 피험자의 피암시성과 실험자의 기대가 연구 결과에 개입할 수 있다는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됨. 최면 연구의 한계를 경험한 뒤 관찰과 실험 통제를 더 중시하는 연구 태도로 이동하게 되는 배경이 됨.
조선 정부가 충청도 공주부에 우두국을 설치해 종두를 시행함. 전주 우두국 설치에 이어 지방 거점에서 우두법을 보급하려 한 조치. 이후 대구·한성 등에도 우두국이 설치되는 기반.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자본론》 제1권 독일어 제3판을 편집함. 마르크스가 남긴 독일어판의 수정 표시와 프랑스어판의 참고 지시를 대조하여, 특히 자본축적 부분의 변경 사항을 반영함.
엥겔스가 임의로 새 저작을 쓴 것이 아니라 저자의 수정 흔적과 지시를 활용한 편집 작업. 이후 영어 초판의 기본 대본으로도 사용된 판본.
일본 육군 참모본부 소속 사코가게노부가 확보한 광개토왕릉비 자료가 일본에 전해짐. 초기 자료는 글자 윤곽을 따라 그리고 먹을 채운 방식의 것이어서, 비면을 직접 뜬 원석탁본과 같은 성격의 자료로 볼 수 없음. 이후 일본의 비문 연구가 본격화되는 출발점이 되었음.
벽돌과 유색 타일, 식물 문양을 결합한 초기 주택 작업에 착수함. 1885년까지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가우디가 독자적인 장식과 공간 언어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출발점이었음.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델 비야르를 이어 성당 건설을 맡음. 1882년에 시작된 기존 사업을 이어받은 것이며, 이후 설계 방향을 크게 바꾸어 장기간에 걸쳐 발전시킴.
박영효가 한성부판윤에서 물러나 광주유수로 옮겨가고, 신문 준비를 돕던 유길준도 사직하면서 한성부의 간행 계획 중단. 유길준이 신문국 장정과 창간사 등을 마련하던 단계에서 추진 인력이 흩어진 상황. 일본인 협력자들도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제외하고 귀국했으며, 이후 김만식이 통리아문을 중심으로 사업을 다시 추진.
교직을 떠나 펜실베이니아로 돌아온 타벨이 미드빌의 잡지 《쇼토콴》에서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한 언론 경력. 성인 독자의 자율학습을 돕는 교육운동과 연결된 매체에서 자료 조사와 기사 작성, 편집 실무를 익힌 시기. 다양한 주제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은 대학에서 얻은 지식을 실제 직업 능력으로 바꾸는 계기. 프랑스 혁명의 여성들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집필 과정에서 성장했으며, 안정된 편집 업무를 넘어 장기 연구와 독립 저술을 택하게 된 발판.
미국의 야구인 치프 벤더. (~195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