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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19년의 기록 10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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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 자격으로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함. 연통제와 교통국 설치, 독립운동 세력의 임시정부 통합 등을 추진하며 임시정부의 조직 기반을 정비함.

안창호

프랭크 다이슨이 조직하고 아서 에딩턴·찰스 데이비슨 등이 참여한 영국 원정대가 프린시페와 브라질 소브랄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해 태양 근처 별빛의 편향을 측정함. 세 관측 자료 중 두 자료가 일반 상대성이론의 예측과 부합했고 한 자료는 초점 문제로 신뢰도가 낮다고 판단한 결과. 1919년 11월 공동학회 발표 뒤 일반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이 세계적 주목을 받은 검증 사건.

일반 상대성이론

신흥중학교가 고산자로 이전해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지청천이 연성대장으로, 윈난강무학교 출신 이범석·러시아군 장교 출신 김경천 등이 교관으로 참여.

장교·하사관 양성 과정에서 전술·병학·지휘 교육을 담당하며 학교의 군사교육 체계 강화. 지청천은 이후 교성대장을 거쳐 서로군정서 사령관으로 활동.

이범석의 신흥무관학교 교관 활동은 1919년 10월에도 확인됨.

신흥무관학교
1919 · 06-28 milestone 조인된 대독 강화조약

연합국과 독일, 베르사유 조약 서명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과 연합국 대표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대독 강화조약인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사건. 조약은 독일의 영토 상실과 군비 제한, 배상 책임 등을 규정하고 국제연맹 창설을 위한 틀을 마련함.

사라예보 암살 사건이 발생한 지 정확히 5년 뒤에 이루어진 조인. 유럽의 전후 질서를 재편했으나 독일 내부의 강한 반발과 국제적 갈등을 낳음. 조약의 서명일은 1919년 6월 28일, 발효일은 1920년 1월 10일로 구별됨.

인종 평등 제안 (1919)

1919년 1월 18일 개막한 파리 강화 회의, 한국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지 않은 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과 함께 폐막.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독립 청원서와 항고서를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에 한국 문제의 의제 상정을 요청했으나, 승전국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외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음. 민족자결주의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선택적 원칙이라는 한계가 드러났으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도 큰 타격을 받음.

김규식 (우사)

1919년 6월 28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정식 취임함.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고 《독립신문》 발행을 주도하며 통합 임시정부 수립을 이끎. 초기 임시정부 운영의 실질적 중심 역할.

안창호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은 1919년 2월 19일 윤충하가 곽종석에게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을 제안한 뒤 6월경까지 약 4개월 동안 전개됨.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에 유림 인사가 참여하지 못한 상황과 일부 유림 명의의 독립불원서에 대한 반발 등이 독자적인 청원운동을 추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함.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이 조직적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사를 호소한 운동으로, 이후 전개된 유림계 독립운동과 구분해 제1차 유림단운동으로도 불림.

파리장서운동

1919년 8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동익리에서 창간. 이광수가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주요한·이영렬 등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함. 상하이 망명 지사들이 국내외 소식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싣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발전시킨 매체로, 민족사상 고취와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외 전파를 발간 목표로 제시함.

독립신문 상하이판 이광수 (춘원) 초대 사장 겸 주필

파리에서의 외교 활동을 마친 김규식이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공채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

김규식 (우사)

이승만이 집정관총재 명의의 공포문으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구미 각국을 상대로 독립 외교와 선전, 자금 모집을 수행하기 위한 기관이었음.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집정관총재 공포문 제2호에 따라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라는 지위에 근거한 조치였으며, 파리에서 독립 외교를 펼친 김규식이 위원장을 맡음. 이 조직은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미국과 유럽에 알리는 외교 창구로 활동했음.

구미위원부는 미국 정부와 의회에 청원하고, 간행물과 강연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음. 미국의 여론과 정책에 영향을 미쳐 한국 문제를 국제정치의 의제로 만들려는 이승만의 외교독립 노선이 조직 형태를 갖춘 것임.

한편 구미위원부의 설치 절차와 운영, 미주에서 모인 재정의 처리 문제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켰음. 1925년 이승만 면직 뒤 임시정부는 폐지를 결정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음. 이후 1941년 설치된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가 공포한 별도 규정에 근거한 기관이었음.

이승만

임시의정원이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음. 새 헌법과 정부 명단은 9월 11일 공포됨.

1919년 9월 6일, 상하이 임시의정원이 정부 통합을 위한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음.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 계통을 하나로 묶으려는 협상의 결과였음. 국무총리 중심의 초기 조직은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두는 체제로 바뀜.

9월 11일에는 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법과 새 국무원의 명단이 공포됨. 임시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였고, 안창호 등 여러 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통합 정부에 참여했음. 다만 정부가 통합되었다고 해서 독립운동 방략과 지도체제에 관한 이견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었음.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다가 1920년 12월 상하이에 왔음. 약 반년의 체류 동안 임시정부의 재정과 권한, 대외활동 방향을 놓고 다른 지도자들과 충돌했음. 선출일인 9월 6일, 헌법 공포일인 9월 11일, 실제 상하이 부임은 서로 다른 시점임.

이승만

상하이·한성·연해주 등에서 구성된 임시정부 계통이 통합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 체제가 성립함. 안창호는 정부 통합을 적극 추진하고 새 체제에서 노동국총판 등을 맡아 임시정부 운영에 참여함.

안창호

D. W. 그리피스 감독의 무성영화 《흩어진 꽃잎 (Broken Blossoms)》 미국 개봉. 백인 배우 리처드 바설메스가 런던에 거주하는 중국인 남성을 연기하고, 학대받는 백인 소녀를 보호하다 비극을 맞는 인물로 묘사한 작품.

《치트》의 위협적인 아시아 남성과 달리 온순하고 희생적인 중국인 남성을 제시했으나, 인물을 고유한 이름보다 ‘황인종 남자’로 지칭하고 동양인을 수동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처리한 한계. 적대적 황화론과 동정적 오리엔탈리즘이 서로 다른 형태로 공존한 사례.

창간 이래 한자 제호 ‘獨立’으로 제21호까지 발행하던 신문이 제22호인 1919년 10월 25일부터 ‘獨立新聞’으로 제호 변경. 이 한자 제호는 제168호까지 유지되었고, 제169호인 1924년 1월 1일부터 한글 제호 ‘독립신문’으로 다시 변경.

프린시페와 소브랄에서 얻은 건판 측정값을 종합해, 태양 가장자리 근처 별빛의 휘어짐이 일반 상대성이론의 예측과 부합한다고 발표함. 채택된 두 주요 측정 결과는 약 1.98초각과 1.61초각으로, 아인슈타인의 예측값 약 1.75초각을 지지함. 이튿날부터 영국과 국제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아인슈타인이 세계적 명사가 되는 전환점이 됨.

일반 상대성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