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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19년의 기록 10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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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운영하던 하와이의 교육사업이 남녀공학 한인기독학원으로 확대됨. 한인 자녀의 한국어 교육과 민족교육을 위한 기반이었음.

1918년 9월,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교육기관이 한인기독학원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됨. 이승만이 1914년 여학생 기숙사를 마련하고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사업이 그 토대였음. 대한인국민회의 지원과 교민사회의 자원을 바탕으로 학교 부지와 교사가 마련되었고, 남녀가 함께 배우는 민족교육기관으로 발전했음.

이승만은 1913년부터 하와이에서 한인 교육과 종교 활동에 힘을 기울였음. 학교와 교회, 한글 간행물은 이민사회에서 언어와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기반이 됨. 다만 학원 운영은 재정난을 동반했음. 1923년 학생 고국방문단을 보내 모금하는 과정에서는 일본 영사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독립운동 원칙과의 충돌을 지적하는 교민사회의 반대도 일어남.

1918년 10월 3일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불가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아들 보리스 3세가 왕위를 계승함.

불가리아가 살로니카 휴전으로 전쟁에서 이탈한 뒤 군주제의 책임 문제가 불거졌고, 페르디난트 1세는 아들 보리스에게 왕위를 넘김. 보리스 3세는 전후 정치·경제적 혼란 속에서 재위를 시작해 1943년 사망할 때까지 불가리아를 통치함.

1918년 10월 28일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위원회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의 성립을 공표하고 독립국가 수립에 관한 첫 법률을 발표.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진행된 체코인·슬로바키아인의 민족자결 운동과 해외 망명정부의 외교 활동이 국내의 정치적 선언으로 이어진 사건임. 같은 해 11월 14일에는 새 국회의 첫 회의에서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가 대통령으로 선출됨.

제1차 세계대전 말인 1918년 10월 31일 부다페스트에서 국화혁명(Aster Revolution)이 성공하며 기존 정권이 무너지고 카로이 미하이가 총리로 취임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과정에서 헝가리의 정치적 독립과 체제 전환을 가속한 사건으로, 헝가리 인민공화국 선포일인 11월 16일과 구분해야 함.

1918년 11월 1일 브루클린 말본 스트리트의 급커브 터널 구간에서 고가철도 열차가 탈선하여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함. 파업 중 투입된 경험이 부족한 대체 운전자의 과속과 목조 차량의 취약성이 피해를 키운 요인으로 지적됨.

오늘날 프로스펙트 파크역 인근에서 일어난 사고로, 지하철의 발전을 노선 확장의 역사만으로 볼 수 없게 하는 안전상의 전환점임. 노동쟁의라는 배경과 별개로 운전자 훈련·속도 관리·차량 구조를 책임지는 운영 체계의 중요성을 드러냄.

제1차 세계대전 말 독일 킬에서 수천 명의 수병과 노동자들이 체포된 수병 석방과 전쟁 종결을 요구하며 시위함. 1918년 11월 3일 군대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시위가 격화됐고 수병 반란은 독일 전역으로 확산돼 11월 혁명과 빌헬름 2세의 퇴위, 공화국 출범으로 이어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안상호의 일본인 배우자와 자녀들을 소개하며 그의 가정을 ‘일선동체’와 ‘내지화’의 성공 사례로 선전함. 기사에서 안상호는 자신을 일본 사람과 같다고 표현하고 조선식 생활과 조선인 사회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고 밝힘.

1918년 말 나라시노 포로수용소에 인플루엔자가 유행해 독일군 포로 25명이 사망함. 수용소장 사이고 도라타로도 1919년 1월 1일 고열에도 신년 인사를 위해 수용소를 찾은 뒤 같은 날 사망함. 사망한 포로 25명은 수용 중 다른 원인으로 숨진 5명과 함께 현재의 후나바시 시영 나라시노 영원에 안장됨.

나라시노 수용소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해 결성된 신한청년당에 김규식이 참여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한국 대표로 선정됨. 영어와 국제 정세에 능통했던 김규식을 통해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로 결정.

김규식 (우사)

이리·챔플레인·오스위고·카유가–세네카 운하를 재편한 뉴욕주 바지선 운하 체계가 완공됨. 동력선 운항을 전제로 일부 구간에 강과 호수를 활용하고, 전기로 작동하는 대형 갑문을 도입했음.

이때의 이리 운하는 1825년 노선을 그대로 보존한 수로가 아니었음. 말이나 노새가 둑길에서 배를 끌던 운송 방식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수운 시설로 바뀌었으며, 이후에도 상업선과 레저선의 통행에 이용되었음.

1918년 새 인플루엔자 A(H1N1)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이 세계적으로 확산함. 제1차 세계대전기의 병력 이동과 대규모 집단생활은 전파에 영향을 주었고, 1918~1919년 여러 차례의 유행 물결이 발생해 세계적으로 막대한 사망을 초래함. 흔히 ‘스페인 독감’이라 부르지만 스페인이 발원지라는 뜻은 아니며 실제 기원은 확정되지 않았음.

1919년 1월 6일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웅변회를 개최하고 구체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의함. 회의 참가자들은 최팔용, 송계백, 김도연 등 실행위원 10명을 선정하고 독립선언 발표 및 일본 정부와 각국 외교공관에 대한 전달 방안을 논의함. 이 움직임은 2월 8일 도쿄의 조선청년독립단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핵심 단계였으며, 이후 3·1운동의 국제적 배경과도 연결됨.

1919년 1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 승전 연합국 대표들이 파리에 모여 강화 조건과 전후 국제 질서를 논의하는 회의를 개막. 미국 윌슨·프랑스 클레망소·영국 로이드 조지·이탈리아 오를란도의 '4대 거두'가 핵심 결정을 주도. 20세기 전반 국제 질서의 틀을 짠 거대한 외교 무대의 출발.

인종 평등 제안 (1919)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자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갑작스러운 죽음 뒤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퍼져 반일 여론이 높아졌으며, 국장을 앞두고 서울로 모인 사람들의 움직임이 3·1운동의 사회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독살설의 유포와 실제 사인을 동일시할 수는 없으며, 고종 사후에는 덕수궁의 궁역 축소와 전각 철거가 더욱 진행됨.

삼일절 덕수궁 기미독립선언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 실행위원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작성에 착수. 백관수·김도연·이광수가 기초위원으로 선출되고, 실제 선언서 문안은 이광수가 전담한 것으로 알려짐. 완성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한국어·일본어·영어로 마련하며 도쿄에서 독립을 선포하기 위한 조직과 문건을 갖춘 단계.

이광수 (춘원) 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