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18–1919년의 기록 86건

구간을 선택해 더 좁은 기간으로 좁혀 보세요.

가장 많은 기록
1919 · 65건
관련 엔티티
76개
날짜가 확정된 기록
83%
구간을 선택해 기록 보기 1919 · 65건

우드로 윌슨·조르주 클레망소·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일본 대표 마키노 노부아키·진다 스테미가 산둥 처리안을 협의함. 일본이 산둥의 중국 주권을 반환하되 독일의 경제적 권리와 칭다오 거류지 관련 권리를 승계한다는 방침을 확인하고, 독일의 권리·재산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 조항을 확정함. 중국의 직접 반환 요구와 충돌한 이 결정이 중국 내 반발과 베르사유 조약 서명 거부로 이어진 전개.

김창숙 등 유림 측은 상하이에서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국문본과 함께 수천 부를 인쇄함. 인쇄본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대표와 각국 공관, 국내 각 향교 등에 발송됨. 파리장서의 내용이 해외 외교 관계자와 국내 유림 사회에 함께 전달되면서 독립청원운동의 범위가 확대됨.

파리장서운동 김규식 (우사) 파리 전달 대상

3·1운동 뒤 독립운동 열기의 고조와 입학생 증가로 기존 합니하 시설의 수용 한계가 커지자, 유하현 제3구 고산자 하동 대두자로 이전·개교하고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고산자 학교를 본교로 삼고 합니하 학교는 분교로 운영. 장교반 6개월·하사관반 3개월·특별훈련반 1개월의 단기 군사교육과정을 편성하며 독립군 양성 체제 정비. 윤기섭이 교감, 이세영이 교장을 맡고 성준용·원병상·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참여.

신흥무관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겸 파리 주재위원인 김규식,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 독립 항고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 『한국 독립과 평화』를 비롯한 홍보 문서도 각국 대표와 언론에 배포하며 일제 식민 지배의 실상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림. 한국 문제가 강화 회의의 정식 의제로 채택되지는 못했으나,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한국인의 독립 요구를 국제사회에 전달한 대표적인 외교 활동.

김규식 (우사)

3·1운동 이후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 자격으로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함. 연통제와 교통국 설치, 독립운동 세력의 임시정부 통합 등을 추진하며 임시정부의 조직 기반을 정비함.

프랭크 다이슨이 조직하고 아서 에딩턴·찰스 데이비슨 등이 참여한 영국 원정대가 프린시페와 브라질 소브랄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해 태양 근처 별빛의 편향을 측정함. 세 관측 자료 중 두 자료가 일반 상대성이론의 예측과 부합했고 한 자료는 초점 문제로 신뢰도가 낮다고 판단한 결과. 1919년 11월 공동학회 발표 뒤 일반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이 세계적 주목을 받은 검증 사건.

일반 상대성이론

신흥중학교가 고산자로 이전해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지청천이 연성대장으로, 윈난강무학교 출신 이범석·러시아군 장교 출신 김경천 등이 교관으로 참여.

장교·하사관 양성 과정에서 전술·병학·지휘 교육을 담당하며 학교의 군사교육 체계 강화. 지청천은 이후 교성대장을 거쳐 서로군정서 사령관으로 활동.

이범석의 신흥무관학교 교관 활동은 1919년 10월에도 확인됨.

신흥무관학교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연합국과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며 대독 강화가 확정. 독일은 협상에서 배제된 채 막대한 배상과 영토 상실, 군비 제한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임. 회의의 핵심 산물이자 이후 독일의 반발과 국제 정세 불안의 불씨가 된 조약.

인종 평등 제안 (1919)

1919년 1월 18일 개막한 파리 강화 회의, 한국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지 않은 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과 함께 폐막.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독립 청원서와 항고서를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에 한국 문제의 의제 상정을 요청했으나, 승전국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외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음. 민족자결주의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선택적 원칙이라는 한계가 드러났으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도 큰 타격을 받음.

1919년 6월 28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정식 취임함.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고 《독립신문》 발행을 주도하며 통합 임시정부 수립을 이끎. 초기 임시정부 운영의 실질적 중심 역할.

안창호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은 1919년 2월 19일 윤충하가 곽종석에게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을 제안한 뒤 6월경까지 약 4개월 동안 전개됨.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에 유림 인사가 참여하지 못한 상황과 일부 유림 명의의 독립불원서에 대한 반발 등이 독자적인 청원운동을 추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함.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이 조직적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사를 호소한 운동으로, 이후 전개된 유림계 독립운동과 구분해 제1차 유림단운동으로도 불림.

파리장서운동

1919년 8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동익리에서 창간. 이광수가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주요한·이영렬 등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함. 상하이 망명 지사들이 국내외 소식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싣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발전시킨 매체로, 민족사상 고취와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외 전파를 발간 목표로 제시함.

파리에서의 외교 활동을 마친 김규식이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공채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

김규식 (우사)

D. W. 그리피스 감독의 무성영화 《흩어진 꽃잎 (Broken Blossoms)》 미국 개봉. 백인 배우 리처드 바설메스가 런던에 거주하는 중국인 남성을 연기하고, 학대받는 백인 소녀를 보호하다 비극을 맞는 인물로 묘사한 작품.

《치트》의 위협적인 아시아 남성과 달리 온순하고 희생적인 중국인 남성을 제시했으나, 인물을 고유한 이름보다 ‘황인종 남자’로 지칭하고 동양인을 수동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처리한 한계. 적대적 황화론과 동정적 오리엔탈리즘이 서로 다른 형태로 공존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