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 참여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평의원에 선임되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에 참여해 10월 감사를 맡음.
같은 해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으로도 이름을 올렸으나, 이 부분은 이후 친일반민족행위결정 취소소송에서 구체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 취소됨.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평의원에 선임되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에 참여해 10월 감사를 맡음.
같은 해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으로도 이름을 올렸으나, 이 부분은 이후 친일반민족행위결정 취소소송에서 구체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 취소됨.
정병욱과 함께 소설가 김송의 서울 누상동 집에서 하숙을 시작한 시기. 학교 밖의 생활 공간에서 문학과 공부를 이어가며 주요 작품을 창작한 한 해. 인왕산 주변의 공간과 청년 시인의 일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생애의 한 장면.
1941년 6월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로 선출됨. 이후 단체 간부로서 지방 시국강연과 강습회 등에 참여하며 전시체제 아래 유림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전개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미외교위원부 설치 규정을 공포하고 이승만에게 대미교섭의 전권을 부여했음.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는 규정을 공포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했음. 임시정부는 신임장을 통해 그에게 미국과 교섭할 전권을 맡겼음. 이승만은 이전부터 사용한 Korean Commission이라는 대외 명칭을 이어갔지만, 이 조직은 1919년 구미위원부와 구분되는 제도적 근거를 갖추었음. 같은 해 그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하여 일본의 팽창정책이 미국과의 충돌로 이어질 위험을 경고했음.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대일전쟁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 한국광복군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보하려 했음.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재미한인이 일본인과 같은 적성외국인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지위를 개선하는 일에도 힘썼음. 이승만은 미국인 후원단체를 활용한 여론 활동과 미국 정부를 향한 청원을 병행했음.
그러나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불승인 방침은 바뀌지 않았음.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은 한국 독립의 요구와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는 데 기여했지만, 독립운동 측이 원한 정부 승인과 공식 참전 지위를 확보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음.
폴란드의 영화감독·각본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독일 점령하의 바르샤바에서 출생함. 이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들며 《데칼로그》와 《세 가지 색》 연작 등을 연출한 인물.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에 《새로운 길》과 《우물 속의 자상화》를 발표한 시기. 후일 《자화상》으로 알려질 작품이 학내 독자에게 소개된 계기. 생전에 출간한 단독 시집은 없었지만 교지·잡지·신문을 통해 발표 활동을 이어 갔음을 보여주는 기록.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전쟁 이후의 국제질서 원칙을 담은 공동선언 발표. 영토 확장 반대, 민족자결, 경제협력, 항행의 자유, 무력 사용 포기와 군축 등의 원칙을 제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공식 참전하기 전 공개된 선언으로, 1942년 연합국 선언 서명국들이 그 원칙을 재확인. 전후 국제기구 창설과 국제연합 헌장 협상에서도 주요 원칙으로 반영.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주요 육상 연결로를 차단하면서 도시 봉쇄가 본격화된 날. 독일 북부집단군의 진격과 핀란드군의 북방 압박 속에서 레닌그라드는 외부와의 연결이 크게 끊겼고, 이후 라도가호를 통한 제한적인 보급에 의존하는 장기 포위 상태에 들어간 전환점.
포위는 1944년 1월 27일까지 872일간 이어졌으며 식량 부족과 혹한, 포격과 공습으로 막대한 군인·민간인 희생이 발생. 도시를 직접 점령하기보다 봉쇄와 기아를 통해 굴복시키려 한 전쟁 방식의 참혹성을 보여주는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대표적 사건.
요코이 군페이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남. 후일 도시샤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으며, 기계와 전자장치를 놀이에 결합하는 개발자로 활동했음.
1941년 10월 전쟁 협력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함. 유림계 활동과 함께 전시동원 단체에도 참여함.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은 삶을 향한 다짐을 담은 《서시》를 씀. 완성된 도덕성을 내세우기보다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양심을 지키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는 작품임. 자선 시집 첫머리에 놓인 이 시는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체를 읽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음.
허영 감독이 연출하고 조선군 보도부가 제작한 《그대와 나》의 국내 개봉. 일제강점기의 내선일체와 지원병제를 선전한 국책영화로, 1941년 11월 15일 일본에서 먼저 개봉한 뒤 같은 달 24일 국내 공개
문예봉·이향란·석금성 등이 출연하고, 황정순은 단역으로 참여하며 처음 영화 현장 경험. 1949년 《청춘행로》의 첫 주연에 앞선 초기 스크린 출연
윤동주가 별을 세는 장면에 고향의 사람들과 그리움을 겹쳐 놓은 《별 헤는 밤》을 창작함.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멀리 있는 존재들과의 관계를 되살리는 작품임. 1941년의 창작 시점과 1948년 유고 시집에 실려 독자를 만난 시점은 구분할 필요가 있음.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거쳐 인도차이나반도로까지 진격하자 미국은 격렬한 항의와 더불어 각종 경제적 제재를 가함. 이에 일제는 1941년 12월 7일, 선전포고 없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 태평양전쟁 일으킴. 이에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이때 1940년 9월에 창설된 한국광복군이라는 정규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임시정부는 진주만공습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 즉각적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겠다는 뜻을 밝힘.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모든 나라의 대일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물리치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이에 특히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낸다.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고, 일개 전투 단위가 되어 *축심국(軸心國)에 대하여 선전 포고한다.
1910년 합병 조약 및 일체 불평등 조약이 무효임을 거듭 선배포한다. 아울러 반침략 국가들이 한국 내에 가지고 있는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왜구(倭寇)를 한국·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하여 혈전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룩한다.
맹세코 일본이 비호하여 조성된 *창춘(長春) 및 난징 정권(南京政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나구선언(羅邱宣言) 각 조를 단호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용하며 이것으로 인해 특히 민주 전선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인), 외무부장 조소앙(인)
대한민국 23년(1941) 12월 10일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졸업 무렵 시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필사본 세 부를 정리함. 이양하와 정병욱에게 각각 한 부를 건네고 나머지를 보관했으나 생전 출간은 이루지 못함. 정병욱에게 전해진 원고가 보존되어 사후 출판의 토대가 되었음.
평양의 기생 권번에서 교육받은 김학순이 17세 무렵 기생 영업을 위해 양아버지와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감.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트럭에 실려 간 뒤 베이징 인근 일본군 부대의 위안소에서 성폭력을 강요당함.
약 넉 달 뒤 조선인 상인의 도움으로 위안소에서 탈출함. 이후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해방 뒤인 1946년 귀국함.
태평양전쟁 기간인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슈에이샤의 사업이 중단됨. 앞서 1940년 10월 전시 통제로 《남자유치원》과 《여자유치원》이 휴간되어 쇼가쿠칸의 《유치원》에 통합됨. 슈에이샤 명의의 출판 활동이 전후까지 거의 끊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