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해 권력을 장악한 뒤 군정과 제3·4공화국을 거쳐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집권.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과 수출·중화학공업 육성을 추진하는 한편, 헌정질서 중단과 장기집권을 통해 유신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정치적 반대와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통치자.
1917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에서 교사로 근무. 1940년 만주국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44년 만주국군 장교로 임관. 해방 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를 거쳐 남한의 군 조직에서 복무했으며, 남로당 가입 이력으로 1948년 숙군 과정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음. 이후 감형 등 구명 과정을 거쳐 한국전쟁 중 현역에 복귀한 경력.
1950년 육영수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박근혜도 훗날 제18대 대통령을 역임.
1961년 군부 일부를 이끌고 장면 내각을 무력으로 무너뜨린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음. 군정은 중앙정보부와 반공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을 통해 정보·수사 권한을 강화하고 기존 정치세력의 활동을 제한. 1963년 군에서 전역해 민주공화당을 기반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며,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어 제3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 1967년 재선과 1969년 3선 개헌을 거쳐 1971년 김대중과의 선거에서 세 번째로 당선.
군정기의 공권력은 사유재산과 언론사 소유권의 강제 이전에도 사용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부일장학회 관련 조사에서 구속된 김지태에게 재산 헌납을 강요한 것을 재산권과 의사결정권 침해로 판단하고, 헌납재산이 박정희의 지시로 5·16장학회의 기본재산이 됐다고 밝힘. 미국 하원의 1978년 한미관계 조사보고서에는 김성곤의 강압적인 요구에 따른 걸프오일의 1971년 민주공화당 선거자금 300만 달러 제공도 기록.
1978년 미국 하원 한미관계 조사보고서는 은행기록과 이동훈 등의 진술이 스위스 계좌의 존재를 뒷받침한다고 정리. 이동훈은 이를 대통령이 사용하는 정부 자금이라고 설명했고, 김형욱은 별도로 정치자금이 박정희 부부 등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제공됐다고 증언. 계좌 존재의 자료 확인과 자금의 성격·개인적 귀속에 관한 증언이 구별되는 사안.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출 진흥, 경부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운동과 중화학공업화 등을 추진하며 산업구조와 사회생활의 큰 변화를 이끈 정부의 최고 책임자. 이 시기 수출과 제조업이 빠르게 성장했으나,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노동권 제약, 대기업 중심의 자원 배분과 경제력 집중도 함께 나타남. 산업화의 성과에는 정부 정책뿐 아니라 기업과 노동자의 활동, 해외 자본·기술 및 국제경제 환경이 함께 작용.
국가폭력의 피해는 정치적 반대세력에 한정되지 않음. 군정기의 서산개척단 강제수용·무급노역, 광주대단지 철거이주민의 생계·주거 위기, 부랑인 단속과 시설 강제수용, 집권기에 운영이 지속된 선감학원의 아동 피해 등에서도 개발·정화·보호를 명분으로 한 통제와 권리 침해가 나타남. 피해는 생업과 교육 기회의 상실, 장기간의 신체적·정신적 고통, 토지권 분쟁과 뒤늦은 배상·진실규명으로 이어진 문제.
1964년부터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고, 1965년에는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경제협력 협정을 체결. 한일협정은 경제협력 자금을 들여오는 통로가 됐으나 식민지 지배와 피해 배상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남겼으며, 파병은 미국과의 군사·경제 협력 확대와 한국군의 전사·부상, 참전자의 후유증을 동반.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도 발생했으며, 퐁니 사건에서는 후대 국내 법원의 1·2심이 대한민국의 국가배상책임을 인정. 1968년 북한 무장대의 1·21 청와대 습격 시도를 겪은 뒤 향토예비군 창설 등 안보 대응을 강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 선언을 통해 남북대화와 대외정책의 변화를 추진한 시기이기도 함.
1972년 10월 비상계엄과 국회 해산,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 정지에 이어 유신헌법을 마련해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 대통령 간선제와 6년 임기, 중임 제한 폐지, 국회의원 정수 3분의 1에 대한 후보 추천권, 국회 해산권과 긴급조치권을 통해 장기집권을 제도화.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제8·9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며, 유신헌법의 개정 요구와 반대 활동은 긴급조치의 처벌 대상.
집권기 중앙정보부와 경찰·군 등을 통한 정치사찰, 불법 연행과 고문, 언론·집회 통제가 이루어졌으며, 김대중 납치와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등 중대한 국가폭력 사건 발생.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는 1975년 사형 확정 다음 날 8명이 처형됐으나 2007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음. 긴급조치도 후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무효 판단을 받았으며, 당시 정권의 수사 발표와 법적 처벌은 이후 진실규명과 재심을 통해 뒤집히거나 재평가됨.
언론과 문화에 대한 통제도 일상으로 확장.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중앙정보부의 동아일보 광고주 압박은 회사 측의 기자 해직과 결합했으며, 대중가요의 금지와 공연 단속, 장발·복장 처벌은 비판적 표현뿐 아니라 창작·향유와 개인의 생활양식까지 제약. 이러한 제도와 관행 가운데 이전부터 존재하거나 사후에도 지속된 부분은 박정희 정권이 유지·강화한 책임과 각 시기의 집행 책임을 구별할 필요가 있음.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가와 의전 인력이 대통령의 사적 연회와 여성 접대에 동원됐다는 기록. 군법회의 진술과 접견기록을 인용한 김재홍의 2011년 기사에 실린 문답에서, 박선호는 10·26 당일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을 사건 뒤 밤 11시 무렵 보내며 금전을 지급했다고 답변. 여성 섭외·인솔과 경호실의 보안서약·접대교육, 일부 반강제적 차출은 김재홍의 취재·해설 서술. 원재판 녹취를 직접 대조한 자료와는 구별되는 기사 인용.
강성재 동아일보 기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9년 3월 21일 청와대 상춘재 만찬에서 박정희가 동아일보의 비판적 보도에 불만을 나타낸 뒤 강성재를 배웅하며 머리로 이마를 들이받음. 이 회고록을 소개한 2013년 동아일보 연재는 박정희가 약 열흘 뒤 기자들 앞에서 정식으로 사과했다고 함께 전함. 당사자의 기명 회고로 전해지는 대통령의 취재기자 상대 폭력 사례.
1974년 국립극장 광복절 경축식의 저격 시도에서 자신은 피격되지 않았으나 배우자 육영수가 총상을 입고 사망. 1979년 YH 노동자 농성 강제진압과 김영삼 의원 제명, 부마민주항쟁 및 군 투입으로 정권에 대한 저항과 탄압이 격화되는 가운데,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 5·16 이후 약 18년의 집권이 끝났지만 이후에도 군부의 권력 장악이 이어졌으며, 그의 통치와 국가폭력의 책임은 한국 현대사의 지속적인 연구·진실규명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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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사실들 7건
트리비아
박정희가 창씨개명 후 사용한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임. 만주국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교육받고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했던 식민지기 경력과 함께 확인되는 이름.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은 문경에서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가 만주국 군관에 지원하며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를 보낸 사실을 보도함. 이 날짜는 신문 발행일로, 혈서를 실제 작성한 날짜와는 구별됨.
긴급조치 제9호에 대한 위헌·무효 판단과 국가배상책임 인정은 별개의 사법적 단계임. 대법원은 2015년 민사상 불법행위책임을 부정했으나, 2022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판례를 변경함.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사법심사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민주화 이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심사함. 긴급조치가 해제되었다는 사정과 처음부터 위헌·무효였다는 판단은 구별되며, 후자의 경우 재심에서 면소가 아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법리가 확립됨.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파병을 한미동맹 유지와 미국의 군사·경제지원 확보에 연계했고, 브라운 각서는 추가 파병에 따른 지원 약속을 명문화한 문서. 파병은 물자·용역 공급과 해외근무 수입을 통해 경제에 영향을 주었지만, 한국군의 전사·부상과 후유증 및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도 남김. 퐁니 사건에서 국내 법원은 2023년과 2025년 대한민국의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함.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은 수출 확대와 공업화,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촉진했지만, 그 성과는 경제관료·기업·노동자·농민의 활동과 해외 자본·기술, 국제시장 여건이 결합한 결과. 저임금·장시간 노동, 농촌 인구의 도시 이동과 산업·지역 간 불균형도 같은 과정에서 확대되어, 성장률만으로 생활과 권리의 변화를 설명하기 어려운 시기.
박정희는 제5·6·7대 대통령에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됨. 유신헌법 이후 제8·9대 대통령 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간접선거로 바뀌어, 다섯 차례의 대통령 선출이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