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이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제1부에 입학해 1928년 졸업함. 재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고, 김교신·송두용·정상훈 등과 교류하며 무교회주의 신앙을 받아들임. 제도 교회보다 성서 읽기와 개인의 신앙적 결단을 중시하는 관점이 이후 그의 종교사상과 사회 참여의 중요한 토대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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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이 1921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함. 재학 중 안창호·이승훈·조만식에게서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영모를 만나 신앙과 사상 형성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파악.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으로 나아감.
함석헌이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함. 일제 학교 당국이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해 퇴학당한 것으로 전해짐. 이후 약 2년간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로 일한 뒤 오산학교로 진학함.
함석헌이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함형택과 김형도의 아들로 태어남. 당숙 함일형이 세운 삼천재에서 한학을 배우고, 1914년 덕일학교를 졸업하며 신학문 교육을 받기 시작함.
1972년 조선일보 주미 특파원으로 부임해 1979년까지 워싱턴에서 활동함. 미국 정치와 외교, 한미관계를 현장에서 취재했으며, 훗날 그의 친미·안보 중심 논평과 국제정세 인식에 중요한 경험적 기반이 된 시기라 추정할 수 있음.
1984년 11월 30일 조선일보 출판국장 시절 「거리의 편집자들」을 게재함. 전두환 정부 아래에서 편집권과 언론 통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칼럼으로 평가되며, 이후 정권과의 갈등 속에서 칼럼 집필이 중단되고 보직이 변경되는 배경 가운데 하나로 거론됨.
1985년 7월호 월간조선에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금남로의 10일」을 게재함. 이 글은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수를 200~300명 정도로 서술한 것으로 전해짐. 김대중은 1997년 글에서 이 기고를 광주와의 ‘악연’ 가운데 하나로 회고함.
1997년 5월 10일 출간된 《5·18 특파원 리포트》에 「악연으로 만났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광주」를 기고함. 1980년 광주 취재와 보도에 대해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일 수밖에 없다”고 회고함. 해당 서술은 1980년 5월 르포의 시민군 묘사를 둘러싼 비판과 함께 이후에도 논쟁의 대상이 됨.
2001년 10월 30일 월간조선사에서 칼럼집 《김대중 주필의 직필》을 출간. 언론의 비판 기능과 현실 비판을 강조한 글들을 묶은 저서로, 조선일보 주필·칼럼니스트로서 축적한 논평 활동을 단행본으로 정리한 출간물.
2003년 1월 11일 조선일보 편집인에서 물러나 워싱턴 근무 이사 기자로 보직을 옮김.
2004년 10월 31일 조선일보 이사기자에서 정년퇴임. 이후 조선일보 고문으로 활동하며 칼럼 집필과 시사 논평을 이어감. 2020년 고문직에서도 물러날 때까지 조선일보와의 관계를 유지함.
2020년 3월 31일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퇴임식을 갖고 조선일보에서의 기자 생활을 마무리함. 퇴임식에서 “기자로 살아서 행복했다. 아부 안 하고 돈 안 밝히고 살아서 좋았다”고 말하며 기자 정신과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함. 퇴임 뒤에도 ‘김대중 칼럼’을 계속 집필하겠다는 뜻을 밝힘.
1990년 3월 11일 조선일보 이사 겸 주필에 취임. 이후 현장 취재보다 칼럼과 사설 집필에 무게를 두며 시사 논평 활동을 이어감. ‘김대중 칼럼’을 통해 정치·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보수적 관점을 지속적으로 제시.
1989년 5월 26일 조선일보 편집국장 겸 이사로 선임됨. 같은 해 2월 이사 겸 논설주간을 맡은 뒤 편집국장으로 보직을 옮겨 신문 제작과 편집을 총괄하게 됨. 이후 조선일보 주필과 편집인 등을 지내며 논설·편집 분야의 주요 보직을 맡음.
1986년 여름부터 약 1년간 영국에서 연수함. 조선일보 출판국장과 현대사연구소장·논설위원실 위원 등을 지낸 뒤 해외 연수를 통해 영국의 정치·사회와 국제정세를 접한 시기임.
위키백과에 의하면 옥스포드 대학교 세인트앤터니 칼리지(St Antony's College)에 갔다고 함.
1980년 5월 25일 조선일보에 광주 르포를 게재하며 광주를 ‘무정부 상태’로, 바리케이드 뒤의 무장 시민을 ‘총을 든 난동자’로 표현함.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시민 희생이 이어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맥락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당시 조선일보 보도의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됨. 김대중은 1997년 회고에서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일 수밖에 없다”고 썼고, 다른 글에서는 해당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밝힌 것으로 전해짐.
1980년 3월 7일 조선일보 사회부장에 취임함. 외신부장 등을 거친 뒤 사회부장으로 보직을 옮기며 취재 부서 책임자로 활동함. 이후 정치부장·출판국장·편집국장·주필 등을 맡으며 조선일보의 편집·논설 분야 핵심 보직을 거침.
조선일보 기자·정치부장·편집국장·주필 등을 지냈으며, 이후 조선일보 고문으로 활동. 전 대통령 김대중과 동명이인인 보수 성향의 언론인·시사평론가.
1967년 8월 충남 청양 구봉광산 붕괴로 지하에 매몰된 광부 양창선의 생존과 구조 과정을 취재·보도함.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김대중은 이 사건 관련 보도로 주목받으며 조선일보 내에서 이름을 알림. 양창선은 매몰 16일 만에 구조되어 전국적 관심을 모음.
1965년 6월 조선일보 수습 8기로 입사하며 기자 생활을 시작함. 수습 기간 편집부와 외신부 등을 거쳤고, 외신부장 리영희 아래에서 외신 기사 작성과 국제정세 보도를 익힘. 이후 외신부·사회부를 거쳐 1967년 정치부 기자로 옮기며 정치 취재 경력을 본격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