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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8일 독일 카셀대학교 학생회와 학생의회가 캠퍼스 내 평화의 소녀상 영구 설치를 추진해 본관 앞에서 제막식을 열었음. 독일 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첫 평화의 소녀상으로, 학생들이 전시 성폭력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역사 교육과 인권의 과제로 기억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사례.

설치 이후 일본 측의 철거 요구와 압박이 이어졌으나, 학생사회와 시민사회가 소녀상을 전쟁범죄와 성폭력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지지하면서 독일 내 기억 운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가 됨.

평화의 소녀상

2019년 8월 3일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가 협박 전화와 항의 확산을 이유로 개막 사흘 만에 전시를 중단함. 전시장에는 김운성·김서경의 평화의 소녀상이 출품돼 있었음.

나고야 시장과 일본 정부 관계자들의 비판, 보조금 지급을 둘러싼 압박이 이어지면서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 내 표현의 자유와 역사 인식 갈등의 상징으로 부상함. 전시는 이후 제한된 방식으로 재개됐으나, 소녀상을 둘러싼 검열 논쟁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킨 사건.

2017년 3월 27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평화비 철거를 요구한 소송의 상고심 심리를 거부함. 일본계 원고들은 기림비 설치가 미국 연방정부의 외교 권한을 침해한다고 주장했으나, 하급심 판단이 그대로 확정됨.

글렌데일 평화비는 지방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기억하는 기념물을 공공부지에 설치할 수 있음을 확인한 대표적 판례가 됨. 이후 해외 평화의 소녀상·기림비 설치를 둘러싼 법적 대응과 기억정치의 중요한 기준점으로 작용함.

2025년 10월 17일 독일 베를린 미테구 행정당국이 모아비트 유니온광장 공공부지에 설치돼 있던 평화의 소녀상을 대집행으로 철거함. 베를린·브란덴부르크 고등행정법원이 전날 코리아협의회의 항고를 기각하며 추가 존치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판단한 뒤 이뤄진 조치임.

미테구는 기존 위치에서 약 100m 떨어진 공개 접근 가능 부지로의 이전안을 제시했으나, 코리아협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 철거 과정에는 경찰이 배치됐고 조각상은 안전한 장소에 보관됨. 일본 정부의 지속적인 철거 요구와 맞물려,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싼 기억·표현의 자유·외교적 압력이 다시 충돌한 사건으로 남음.

2020년 9월 28일 재독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가 독일 베를린 미테구 모아비트 유니온광장에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하고 제막식을 열었음. 김운성·김서경이 제작한 소녀상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전시 성폭력 문제를 기억하고 성폭력 없는 사회를 요구하는 공공 기림비로 건립됨.

독일 공공부지에 세워진 첫 평화의 소녀상으로, 코리아협의회가 추진한 전시 성폭력 반대·역사 교육 활동의 거점이 됨. 설치 직후 일본 정부가 독일 외교 당국과 베를린 행정기관에 철거를 요구하면서, 소녀상의 존치를 둘러싼 국제적 기억정치와 외교 갈등의 상징적 사례로 부상함.

평화의 소녀상

2018년 10월 2일 일본 오사카시가 샌프란시스코시의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수용에 반발해 약 60년간 이어진 자매도시 관계를 단절한다고 발표함. 오사카시는 기림비가 일본을 부당하게 비난하고 양 도시의 신뢰를 훼손했다고 주장함.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를 둘러싼 갈등이 국가 간 외교를 넘어 지방정부 간 도시 외교와 국제 기억정치의 충돌로 확장된 사례.

2017년 9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메리스 광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기림비 ‘여성들의 기둥(Women’s Column of Strength)’을 제막함. 조각가 스티븐 와이트가 제작한 청동상으로, 한국·중국·필리핀 출신 소녀 세 명이 서로 손을 잡고 원을 이루며 서 있는 형상과 이를 바라보는 고령의 피해 여성상을 함께 구성함.

기림비는 위안부정의연대(Comfort Women Justice Coalition)가 모금과 추진을 주도해 건립함.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를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여성들이 겪은 전시 성폭력의 역사로 기억하려는 기념물로 자리 잡음.

2017년 1월 6일 일본 정부가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재설치에 항의하며 주한 일본대사와 부산 주재 총영사의 일시 귀국을 결정함. 동시에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과 고위급 경제협의 개최를 중단·연기하는 조치를 발표함. 일본 정부는 이를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어긋나는 사안으로 규정했으며, 소녀상 문제가 양국의 외교·경제 협력에도 영향을 미친 대표 사례가 됨.

평화의 소녀상

2016년 12월 30일 부산 동구청이 철거했던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허용하면서, 시민단체가 주부산일본총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다시 세움. 현장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기림비도 함께 설치됨. 일본 정부는 즉시 한국 정부에 유감을 표하고 철거를 요구했으며, 부산 소녀상은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외교 갈등의 직접적 쟁점으로 떠오름.

평화의 소녀상

2016년 12월 28일 부산 시민단체가 주부산일본총영사관 앞 인도에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했으나, 부산 동구청이 이를 도로법상 불법 시설물로 판단해 약 4시간 만에 철거함. 설치 과정에서 시민단체와 경찰이 대치하고 일부 참가자가 연행되면서 논란이 커짐. 철거 조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기억을 공공장소에 남기려는 시민사회 활동과 행정당국의 충돌을 드러낸 사건.

평화의 소녀상

2015년 12월 28일 한국 정부(박근혜 대통령)와 일본 정부(아베 신조 총리)가 서울에서 열린 윤병세·기시다 후미오 외교장관회담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한 합의를 발표함.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와 책임을 통감한다는 입장, 아베 신조 총리의 사죄·반성 표명, 일본 정부 예산 약 10억 엔을 통한 피해자 지원 재단 설립 방침을 제시함. 양국은 해당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확인하고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하기로 함.

합의에는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 관해 한국 정부가 관련 단체와 협의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는 내용도 포함됨. 피해자와 시민사회는 협상 과정에 피해자 중심 접근과 민주적 절차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비판했으며, 이후 합의의 정당성과 효력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짐.

평화의 소녀상

2013년 7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시 중앙공원에서 한국계 시민단체가 건립한 글렌데일 평화비를 제막함. 서울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본뜬 청동 기림비로, 소녀와 빈 의자가 나란히 놓인 형상으로 제작됨. 글렌데일 시의회가 설치를 의결하고, 캘리포니아 한국계 미국인 포럼이 모금과 건립을 주도함. 미국 서부의 공공부지에 세워진 첫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가운데 하나로, 평화의 소녀상이 국외 시민사회와 지방정부의 기억 운동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됨.

평화의 소녀상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제1,000차 수요시위를 맞아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함. 김운성·김서경이 제작한 이 청동상은 단발머리 소녀가 빈 의자 곁에 앉아 일본대사관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구성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엄과 인권 회복,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해결을 요구해 온 수요시위의 기억을 공간에 새긴 기림비로 자리 잡음. 이후 국내외 여러 지역에 유사한 소녀상이 세워지며 전시 성폭력 피해와 역사적 책임을 둘러싼 기억 운동의 상징으로 확산됨.

평화의 소녀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1919년 3·1운동부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195명을 최종 결정하고, 조사 결과를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함. 성대경 위원장 체제에서 나온 첫 번째 대규모 명단 공개로, 제1기 106명과 합쳐 위원회가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총 301명이 됨.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민족분열 정책, 독립운동 탄압에 협력한 인물들을 국가 차원에서 조사·심의한 중간 성과.

성대경

성대경이 2016년 10월 26일 오후 서울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함. 향년 84세. 한국 근현대사와 사회주의운동사 연구를 이어 온 역사학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가 차원의 친일 청산 작업을 이끈 연구자로 남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5년 5월 출범 뒤 약 4년 6개월간의 활동을 마치고 종료됨. 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대한 조사·심의 결과를 총 25권의 『친일반민족진상규명 보고서』로 정리해 대통령에게 보고함. 이후 위원회 결정에 관한 행정소송 수행과 사후관리, 관련 민원 업무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으로 이관됨. 국가기관이 친일 행적을 조사·심의·결정하고 기록으로 남긴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의 한 축으로 남음.

성대경 당시 위원장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제3기인 1937년 중일전쟁 발발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명을 추가 공개하고, 총 25권의 『친일반민족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 제1·2기 명단 301명과 합쳐 보고서에는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이유가 수록됨. 방응모와 김성수 등은 포함됐으나, 박정희·장지연·안익태 등은 제외돼 선정 기준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짐.

홍난파는 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지만, 행정소송에 따른 법원의 효력정지 결정으로 당시 보고서에서는 빠졌음. 이후 2010년 후손이 소송을 취하하면서 홍난파의 명단 재등재가 가능해졌고, 후대의 위원회 집계에서는 제3기 705명, 전체 1,006명으로 정리됨.

성대경 위원장

성대경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제2대 위원장으로 취임함. 2005년 위원회 출범 때부터 비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강만길 초대 위원장의 사퇴 뒤 후임 위원장으로 임명됨.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 조사와 대상자 결정, 진상규명보고서 작성으로 이어지는 국가 차원의 과거사 청산 작업 후반부를 이끎.

성대경 위원장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를 엮어 역사비평사에서 출간함.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해외 망명지의 사회주의운동, 해방 뒤 분단 고착화 과정에서 사회주의가 수행한 역할 등을 다룬 연구 논문 9편을 묶은 책. 한국 현대사에서 상대적으로 도외시되어 온 사회주의사 연구의 범위와 쟁점을 확장한 연구서.

성대경

성대경이 강만길과 함께 엮은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냄.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과 노동·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생애와 활동을 사료를 바탕으로 집성한 615쪽 분량의 인명사전. 해방 이후 오랫동안 주변화되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이력을 연구와 공적 기억의 대상으로 복원한 기초 자료.

성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