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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1449년의 기록 3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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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대 조정이 태조·정종·태종실록을 네 질로 등사해 한양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함. 한 곳의 재난으로 기록 전체가 소실되는 일을 막기 위한 분산 보존 체계로, 조선 전기 4대 사고제의 기틀 확립. 임진왜란 때 세 곳의 사고가 소실된 가운데 전주사고본이 보존되어 조선 전기 실록 전승의 기반이 됨.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 학자와 전의감 의관들이 중국·고려의 의서 150여 종에서 이론과 처방을 뽑아 병증별로 분류한 『의방유취』 365권을 편찬함. 동아시아 의학 지식을 대규모로 집성한 국가 편찬 사업으로, 세종 대 의학 정책이 향토 약재 정리에서 종합 의학 지식 체계화로 확장된 결과.

권제·정인지·안지가 한글 노래와 한시로 구성된 《용비어천가》 10권을 세종에게 올림. 함께 바친 글에서 총 125장을 지었다고 보고하고 왕실 선대의 행적과 창업의 어려움을 후손에게 전하려는 뜻을 밝힘. 세종은 이를 판에 새겨 간행하도록 명함.

편찬자들이 제시한 취지

권제 등은 세종에게 올린 글에서 민간의 칭송을 모으고 왕실 선대의 행적을 찾아 국어로 노래한 뒤 한시로 그 뜻을 풀이했다고 설명함. 중국 상·주 왕조의 선조를 노래한 고사에 조선 왕실의 계보를 견주고, 태조의 건국과 태종의 정치적 공적을 찬양함.

편찬자들은 왕업을 이루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자손에게 전하고 노래를 관현악에 얹어 널리 사용하게 해 달라고 요청함. 국왕에게 바친 이 글은 왕조의 기원을 정당화하는 편찬 목적과 후손에게 선대의 어려움을 기억시키려는 요청을 함께 담음.

한글 가사와 한시로 된 《용비어천가》에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한문 주해를 붙여 10권 5책으로 간행함. 최항·박팽년·강희안 등이 주해와 음훈 작업에 참여했으며, 왕실 선대의 행적에 관한 기록과 가사의 배경을 책에 함께 수록함.

《용비어천가》 제39장 주해에 집안 지역의 성과 큰 비석에 관한 기록을 수록함. 이 비석은 오늘날 광개토왕릉비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되지만, 당시 기록은 주변 유적을 금나라의 것으로 설명함.

세종이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삼은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을 공적·사적 연향에 통용하도록 함. 왕실 선대의 공덕을 노래하는 음악을 종묘에만 한정하지 않고 여러 의례와 잔치에서 사용하도록 정한 조치.

음악을 통한 보급

의정부는 예조의 공문을 바탕으로 왕실의 공적을 위아래에서 함께 노래하게 하자는 뜻을 밝힘. 조참과 외교문서를 보내거나 황제의 조칙을 맞는 행차 등에 사용할 곡과 궁조도 구체적으로 제안했으며, 세종이 이를 따름. 책의 간행·하사와 별도로 노래의 연주 장소와 사용 절차를 제도로 정한 일.

실록은 세종이 《용비어천가》에 관현악을 붙이고 빠르기를 조절해 세 곡을 만들었으며 악보도 갖추었다고 기록함. 한글 가사를 노래하는 치화평·취풍형과 한문 가사를 사용하는 여민락이 궁중 악무의 구성곡으로 이어짐.

세종 대 조정이 개량한 화포의 주조법과 규격, 화약 제조·사용법을 그림과 함께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간행해 군사 기밀로 보관함. 세종이 군기감의 화포 개량과 발사 시험을 직접 지휘한 뒤 1445년 각 도에 새 규격의 화포를 주조하게 한 사업을 집대성한 군서.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 등이 태종의 불교 억제를 찬양한 《용비어천가》 구절을 들어 세종의 불당 건립에 반대함. 선대의 정치를 자손이 지켜야 한다는 노래의 내용을 근거로, 이를 편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를 높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간함. 세종은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공사를 지시함.

왕실 찬양의 노래와 국왕에 대한 간언

신석조 등은 불당의 위치를 궁성 안에서 밖으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함. 《용비어천가》에 실린 태종의 사찰 정리와 후손에 대한 경계 내용을 세종에게 적용하면서 선왕을 본받으라고 요구한 것.

세종은 이미 뜻을 정한 일이며 의심이 없는 사안은 독자적으로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힘. 도승지 이사철 등도 신하들의 의견을 따를 것을 청했으나, 세종은 선공 제조 민신을 불러 방패군 200명에게 공사를 시작하게 함. 불교에 대한 배척은 상소한 신하들의 논리로 기록된 것이며, 국왕의 결정은 그들의 요구와 달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