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20년의 기록 40건

106년 전.한 해의 기록을 월별로 살펴보세요.

가장 많은 기록
4월 · 8건
관련 엔티티
32개
날짜가 확정된 기록
73%
월을 선택해 기록 보기 4월 · 8건

일제와 장쭤린 군벌 측 중국 관헌이 합동수색대를 편성해 신흥무관학교와 한족회 등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를 습격하고 독립운동가를 체포·살해.

1920년 1월의 한족회 해산·학교 폐쇄 명령 뒤 탄압이 무력 작전으로 확대된 시점. 신흥무관학교의 안도현 이동과 운영 종료로 이어진 직접적 배경이 됨.

일제와 중국 군경의 합동 탄압을 피해 신흥무관학교가 안도현 밀림 지대로 이동. 지청천·김동삼 등은 소속 인력과 함께 제2의 군사기지 구축과 독립전쟁 준비를 추진.

그러나 피난지에서도 학교 운영을 지속하기 어려워 약 한 달 뒤인 1920년 8월경 해산. 폐교 뒤 생도와 교관 인력은 독립군 부대로 편입. ```

대흉작에 따른 재정난, 교내 갈등과 사고, 마적의 습격,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이 겹치며 신흥무관학교 폐교. 1911년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독립군 양성기관의 약 9년 운영 종료.

폐교 뒤 지청천은 사관생도 약 300명을 이끌고 안도현 삼림지대로 이동해 홍범도 부대와 연합.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력은 이후 여러 독립군 부대와 군정 조직에서 활동하며 만주 무장 독립운동의 인적 기반 형성.

뉴욕 월스트리트의 J. P. 모건 건물 맞은편에 세워진 마차가 폭발해 30명 이상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약 300명이 부상. 미국 수사당국은 아나키스트 계열의 범행 가능성을 수사했으나 범인은 끝내 확정되지 않았으며, 초기 연방 수사기관이 다룬 대표적 테러 사건으로 기록됨.

안창호가 미주 단원들을 상하이로 불러 1920년 9월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를 설치함. 미주에 한정되던 활동을 중국 지역으로 확장한 전환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한 상하이를 거점으로 국외 민족운동의 폭을 넓힌 계기.

안창호

《워커스 드레드노트》에 실린 기사들이 전시 국방 관련 법률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팽크허스트가 런던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음. 여성 참정권 운동 이후에도 노동자와 공산주의 운동의 입장을 신문으로 전하던 과정에서 받은 처벌이었음. 수감은 편집 활동을 제약했지만 신문 발행은 지지자들의 지원 속에서 계속되었음.

실비아 팽크허스트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과 교전. 일제와 중국 군경의 탄압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운영을 중단했지만, 지청천 등은 사관생도와 졸업생을 중심으로 교성대를 편성해 독립군 부대에 합류.

북로군정서의 연성대장 이범석 등 신흥무관학교와 인연을 가진 교관·졸업생들이 지휘관과 전투원으로 참여.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 정예부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군의 대일 항전이며, 신흥무관학교가 양성한 군사 인력이 만주 무장 독립운동의 전장으로 이어진 사례.

신흥무관학교

무사시야를 이어받은 미야모토 고이치로가 유카타·벽축면 등 일본 기모노용 직물을 활용해 와풍 문양의 맞춤 셔츠를 제작함. 무사시야는 1920년대부터 호놀룰루에서 일본계 이민 사회와 관광객을 상대로 셔츠를 판매하며, 일본 직물과 하와이식 개방 칼라 셔츠가 결합하는 초기 흐름에 참여함.

1930년대 초에는 일본산 프린트 직물로 만든 맞춤 셔츠도 제작한 것으로 전해짐. 다만 알로하 셔츠의 ‘최초’ 제작자나 단일한 기원으로 단정하기보다, 무사시야를 일본계 이민 재단사들이 알로하 셔츠의 형성에 기여한 대표적 사례로 보는 편이 정확함.

알로하 셔츠 (하와이안 셔츠)

신흥무관학교 폐교 뒤 지청천이 사관생도 약 300명을 이끌고 백두산 일대 안도현 삼림지대로 이동해 홍범도 부대에 합류. 이들은 이후 김좌진 부대를 따라 밀산으로 이동한 독립군 통합 과정에 참여.

밀산에 집결한 여러 독립군 세력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면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생도 인력도 통합 독립군 조직의 기반에 편입. 학교의 군사교육 인력이 독립전쟁과 독립군 통합으로 이어짐.

신흥무관학교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내세우며 조선인의 한글 신문 발행을 제한적으로 허용함.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간 조선어 신문이 창간되면서 1910년대 내내 유지되던 매일신보의 조선어 신문 독점 구도 종료. 이후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남되, 민간 조선어 신문들과 병존하는 언론 구도 속에 위치.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오늘날의 몽촌토성이 이리토성이라는 이름으로 보고됨. 이후 백제의 한성 도읍지와 성곽을 찾는 연구에서 이 유적의 위치와 성격이 논의되었음.

당시의 기록은 현대적인 대규모 발굴 이전에 성곽의 존재가 조사되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임. 성 내부의 구조와 생활상을 밝히는 본격적인 발굴은 1980년대에 이루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