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리오 스타이넘과 루스 누네빌러 사이에서 태어남.
글로리아 스타이넘
미국의 언론인·작가·정치활동가이자 여성운동 조직가. 1960년대 잡지 언론에서 활동을 시작해 1969년 여성들의 낙태 경험 공개 증언회를 취재한 뒤 여성해방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함. 전미여성정치회의와 페미니스트 잡지 《Ms.》 등의 공동 창립에 참여하며 미국 제2물결 페미니즘의 요구를 대중언론과 제도정치로 확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함. 성평등을 재생산권·인종차별·노동·미디어 재현의 문제와 연결했으며, 후기에는 국제 여성 연대와 한반도 평화운동까지 활동 범위를 넓힘.
기본 정보
추가 정보
글로리아 마리 스타이넘은 1934년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생활했고, 부모의 이혼 뒤에는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 루스와 지냈다. 스미스 칼리지에서 행정학을 공부한 뒤 1956년 졸업했으며, 장학 프로그램으로 인도에 머물면서 풀뿌리 조직화와 비폭력 정치운동을 접했다. 이 경험은 이후 인종·계급·성별의 문제를 분리하지 않고 보려는 그의 활동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뉴욕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던 그는 여성 기자에게 주어지는 제한적인 취재 기회와 맞섰다. 1963년 플레이보이 클럽에 ‘버니’로 위장 취업해 노동조건과 성적 대상화를 폭로한 「A Bunny's Tale」로 이름을 알렸지만, 잠입취재의 선정성이 오랫동안 다른 취재 기회를 가로막기도 했다. 1968년 창간된 《뉴욕》의 기고편집자로 활동했고, 1971년 말 시험판을 낸 뒤 1972년 독립 잡지로 출범한 《Ms.》의 공동 창립 편집자가 되었다.
스타이넘의 영향력은 개인적 명성보다 다른 활동가·조직과의 협업에서 형성되었다. 도러시 피트먼 휴스와 함께 전국을 돌며 강연했고, 플로린스 케네디·벨라 앱저그·셜리 치점 등과 여성의 재생산권, 인종차별, 빈곤, 정치 대표성 문제를 연결했다. 동시에 언론이 백인 중산층 여성인 스타이넘을 운동의 단일한 ‘얼굴’처럼 다룬 데 대한 비판도 있었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제2물결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개인의 전기이면서, 서로 다른 배경의 여성들이 만든 연합운동의 역사로 읽을 필요가 있다.
초기 경력에는 냉전기 미국 정치와 얽힌 논쟁도 있다. 스타이넘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독립연구서비스(Independent Research Service)를 통해 세계청년축제에 참가할 미국 학생들을 조직했는데, 이 사업은 CIA의 비밀 자금을 받았다. 그는 자금 출처를 알고 있었다고 훗날 인정하고 협력을 옹호했다. 이는 확인된 경력과 판단의 문제이지만, 곧바로 ‘CIA가 여성운동을 만들었다’는 식의 확대 해석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해당 활동은 그가 여성해방운동의 대중적 지도자로 부상하기 전의 일이다.
후기에도 그의 선택은 논쟁을 낳았다. 1998년 빌 클린턴의 성비위 의혹을 다룬 칼럼은 성희롱을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는 2017년 같은 방식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에는 남북 여성들과 평화운동가들이 참여한 Women Cross DMZ의 비무장지대 횡단에 나섰다. 이 행사는 한반도 평화를 국제 여성 연대의 의제로 부각했으나 북한 인권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스타이넘은 2026년 9월 2일 뉴욕 자택에서 92세로 사망했다.
타임라인
17스미스 칼리지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뒤 장학 프로그램으로 인도에 머물며 풀뿌리 조직화와 비폭력 정치운동을 접함.
독립연구서비스를 이끌며 세계청년축제에 참가할 미국 학생들을 조직함. 이 사업은 CIA의 비밀 자금을 받았고 스타이넘은 훗날 자금 출처를 알고 있었다고 인정하며 협력을 옹호함.
뉴욕 플레이보이 클럽에 ‘버니’로 위장 취업해 여성 종업원의 임금·복장·건강검진과 성적 대상화 실태를 기록한 2부작 「A Bunny's Tale」을 발표함.
클레이 펠커가 창간한 주간지 《뉴욕》에서 정치·사회·대중문화 기사를 쓰는 기고편집자로 활동을 시작함.
급진 여성단체 레드스타킹스가 연 낙태 경험 공개 증언회를 취재한 뒤, 여성의 경험을 당사자가 직접 말하는 방식의 정치적 힘을 확인하고 여성해방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함.
미국 상원 사법위원회 헌법수정 소위원회에서 성별에 따른 법적 차별을 금지하는 평등권 수정헌법(ERA)의 비준을 촉구함.
워싱턴 D.C.에 모인 26개 주의 여성 320여 명이 여성의 선출직·임명직 진출과 정책 영향력 확대를 목표로 전미여성정치회의를 창립함.
《뉴욕》 잡지에 삽입된 《Ms.》 시험판을 발행해 여성의 정치·노동·재생산권과 일상 경험을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다루는 전국 잡지의 가능성을 시험함.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연방정부 지원 전미여성회의에 대표·연설자로 참여해 ERA, 재생산의 자유, 소수자 여성의 권리 등 전국 행동계획 논의에 힘을 보탬.
1960년대 이후의 주요 기사와 에세이를 모은 선집 《Outrageous Acts and Everyday Rebellions》를 출간함.
Ms. 여성재단이 여자아이의 자존감과 진로 시야를 넓히기 위해 ‘딸을 직장에 데려가는 날’을 미국 전역에서 처음 시행함.
《뉴욕타임스》 기고문 「Feminists and the Clinton Question」에서 빌 클린턴에 대한 여성들의 진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행위가 직장 내 성희롱의 기준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함.
뉴스와 대중문화에서 여성의 목소리와 전문성이 더 정확하고 다양하게 반영되도록 하기 위해 여성미디어센터를 공동 창립함.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미국 최고 권위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음.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포함한 국제 여성 평화활동가 30명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비무장지대를 넘어 한반도 종전과 평화협정, 이산가족 상봉, 평화과정의 여성 참여를 촉구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미국 뉴욕 자택에서 92세로 사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