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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렬

1987 20건
39년 전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1987년 6월 29일 시국수습을 위한 8개 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함. 여야 합의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새 헌법에 따른 대선 실시, 공정 경쟁을 위한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기본권 강화, 언론 자유 보장, 지방·교육 자치, 정당 활동 보장 등을 제시함. 전두환의 재가 아래 6월항쟁의 핵심 요구를 사실상 수용한 조치로, 5공화국 권위주의 체제의 후퇴와 민주화 이행을 결정지은 분기점.

6월 민주항쟁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하기 어려워지고, 군 투입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국제적 고립과 광주 재현의 위험을 낳을 수 있던 상황. 전두환 정권은 강경 진압 대신 민주화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함. 선언은 이후 제9차 헌법 개정과 제13대 대통령 직선제 선거로 이어지는 제도 전환의 출발점이 됨.

전두환 직선제 수용 결정 6월 민주항쟁

국본이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전국 37~38개 시·군에서 동시에 벌임.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6월 항쟁 최대 규모의 시위로, 대도시뿐 아니라 군 단위 농촌까지 시위가 번짐.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함이 분명해지며 정권을 6·29 선언으로 내몬 결정적 항쟁.

6월 민주항쟁

국본이 무차별 최루탄 사용에 항의해 6월 18일 '최루탄추방 국민대회'를 전국에서 개최함. 전국 주요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부산에서는 노동자 이태춘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뒤 6월 24일 사망함. 회사원·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며 학생 시위가 시민 항쟁으로 확산된 분수령.

6월 민주항쟁

6월 10일 국민대회 뒤 시위를 벌이던 학생·시민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6월 15일까지 농성을 이어감. 인근 계성여고 학생과 시민들이 도시락·물을 전달하며 지원했고, 사제단의 중재로 6월 15일 오후 자진 해산함. 단발성으로 끝날 뻔한 6·10 국민대회를 지속적 항쟁으로 전환시킨 분기점.

민주정의당이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함. 같은 날 열린 국본의 6·10 국민대회와 정면으로 대비되며, 정권의 권력 승계 의지를 드러낸 행사. 이후 노태우는 6·29 선언을 거쳐 그해 12월 직선제 대선에서 당선됨.

6월 민주항쟁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6월 1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함. 경찰의 원천봉쇄로 대회장에는 소수만 참여했으나, 오후 6시를 기해 차량 경적과 흰 손수건 흔들기 등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이 동참함. 6월 항쟁의 본격적 시작을 알린 날로, 이날 밤 명동성당 농성으로 이어짐.

국본은 6·10 대회를 앞두고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에 맞춰 차량 경적을 울리고 흰 손수건을 흔드는 평화적 시위 지침을 내림. 경찰이 대회장인 성공회대성당을 봉쇄하자 시위는 도심 전역으로 번졌고, 택시·버스 기사들의 경적과 회사원들의 호응이 잇따름. 한편 같은 날 민정당은 잠실체육관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 정권의 호헌 의지와 국민의 직선제 요구가 정면으로 충돌한 상징적 하루가 됨.

6월 민주항쟁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던 이한열은 교문 앞에서 독재 타도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가두시위를 하던 중 전투경찰이 쏜 SY-44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짐. 당시 그가 피를 흘리며 동료 학생(박남식 씨 등)에게 부축되어 쓰러지는 장면은 외신기자(정태원 씨)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전 세계에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알림. 이 사건은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며 6월 민주 항쟁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됨.

존 보이드가 「Organic Design for Command and Control」 브리핑에서 OODA 루프를 지휘통제 이론의 문제로 확장함. 이 브리핑은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경쟁 환경에서 조직이 협력하고 적응하기 위한 암묵적 조정, 상호 신뢰, 분권적 판단의 중요성을 다룸. OODA 루프가 개인 조종사의 의사결정 순환을 넘어 조직적 지휘와 적응의 원리로 해석되는 중요한 중간 단계.

OODA 루프

World No Tobacco Day.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정. 흡연의 심각한 폐해를 알리고 전 세계적으로 담배 연기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1987년에 제정.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5월 18일 폭로로 고문 가담 경관이 5명이며 경찰이 범인을 2명으로 축소해 발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검찰이 사건을 재수사함. 1987년 5월 29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사건 조작 과정에 깊이 관여한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장 박처원 치안감,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을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함.

앞서 경찰은 황정웅·반금곤·이정호 등 은폐됐던 고문 가담 경관 3명의 신병을 확보해 검찰에 넘겼고, 이들은 5월 21일 구속됨. 이로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범인 축소·은폐에 관련된 구속자는 모두 8명으로 늘어남. 대공수사 지휘라인까지 구속되면서 경찰 내부의 조직적 은폐가 공식적으로 확인됨.

4·13 호헌조치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야당 정치인과 재야·종교계·학생운동권 인사 2200여 명이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함. 국본은 호헌조치를 무효로 선언하고 각종 악법의 개정과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 운동을 결의함. 전국 조직망을 갖춘 국본은 6·10 국민대회 등 6월 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끈 통일 지도부가 됨.

6월 민주항쟁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은 경찰이 발표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과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수사 간부가 사건 축소·조작에 관여했다고 폭로함.

진실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에게 전달된 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 재야 인사 김정남 등을 거쳐 사제단에 전해짐. 정권이 물고문 사실을 감추고 일부 경찰관만 희생양으로 내세워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임.

폭로 직후 박종철 사건은 다시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