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창 치안본부장, 물고문 시인하고 조한경·강진규 구속
언론 보도와 부검 결과로 의혹이 커지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건 발생 5일 만에 기존 발표를 뒤집고 물고문 등 가혹행위 사실을 공식 시인함. 수사 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함. 다만 가담자를 2명으로만 한정해 이후 드러나는 조직적 축소·은폐의 출발점이 됨.
언론 보도와 부검 결과로 의혹이 커지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건 발생 5일 만에 기존 발표를 뒤집고 물고문 등 가혹행위 사실을 공식 시인함. 수사 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함. 다만 가담자를 2명으로만 한정해 이후 드러나는 조직적 축소·은폐의 출발점이 됨.
박종철의 사망 직후 현장에 출동했던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고 증언하며 단순 쇼크사 발표에 의문을 제기함. 이어 부검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가 1월 17일 온몸의 피멍과 폐 손상 등 물고문·전기고문 흔적을 확인함. 경찰의 '쇼크사' 주장을 무너뜨리고 고문치사의 진상을 드러낸 결정적 전환점.
경찰은 사망 다음날, 박종철이 조사를 받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단순 쇼크사했다고 공식 발표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함.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이 사건의 축소·은폐 조작에 관여함. 실제 고문 가담자가 5명이었음에도 경찰은 2명만 가담한 것으로 발표하며 책임을 축소하려 했고, 이 조작은 5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무너짐. 박처원은 같은 달 29일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됨.
1987년 1월 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이 고문 끝에 사망한 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은 대공수사 지휘라인의 핵심 인물로서 사건 축소·은폐 조작에 관여함. 경찰은 실제 고문 가담자가 5명이었음에도 조한경·강진규 두 명만 가담한 것으로 발표하며 책임 범위를 축소하려 함.
경찰은 처음 박종철의 사망을 단순 쇼크사로 설명하며 고문 사실을 부인했고, 이후 부검 결과와 여론 압박으로 물고문 사실을 시인함. 이른바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표현은 1월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공식 발표에서 나온 것으로, 박처원은 그 발언의 직접 화자는 아니었음.
5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고, 치안본부 간부들이 범인 축소·은폐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짐. 박처원은 유정방·박원택 등과 함께 5월 29일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됨. 사건 은폐의 붕괴는 전두환 정권의 국가폭력과 민주화 요구를 결집시키며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됨.
서울대생 박종철,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 경찰의 은폐 시도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가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며 6월 항쟁의 주요 계기 중 하나가 됨.
《용형호제》가 1987년 1월 1일 한국에서 개봉하며 홍콩 개봉보다 20일 앞서 관객과 만남. 수입은 동아수출공사가 맡았으며, 1986년 12월 23일 등급분류를 마치고 신정에 개봉한 일정. 1980년대 한국 극장가에서 성룡 주연 홍콩 액션영화가 신년 대목에 배치된 사례.
1986년 제25회부터 한국영화인협회가 영화진흥공사와 공동 주최자로 참여함. 1991년 한국영화인협회 단독 주최 체제로 바뀌고 1992년 제30회부터 민간기업이 참여하면서 정부 주도 영화상에서 민간 영화계 중심 시상식으로 전환함.
샘 닐이 영화 《007 리빙 데이라이트》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을 배우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음. 제작진은 로저 무어의 하차 이후 새로운 제임스 본드를 찾으며 여러 배우를 검토했고 샘 닐도 후보에 포함됨.
샘 닐은 당초 자신의 기존 연기 경력으로 충분하다며 테스트를 꺼렸으나 제작진의 요청으로 참여함. 《여왕 폐하 대작전》의 장면 등을 활용한 테스트 촬영이 진행됐으며, 최종적으로 제임스 본드 역은 티머시 돌턴에게 돌아감.
《나의 화려한 인생》, 《오멘 3》, 《Reilly, Ace of Spies》 등으로 국제적인 경력을 쌓은 샘 닐이 당시 세계적인 영화 프랜차이즈의 주연 후보로 거론될 정도의 입지를 확보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임.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이듬해 니혼덴소를 퇴사하고 도쿄로 거처를 옮겨 전업 작가 생활 시작. 그러나 이후 약 10년간 뚜렷한 대표작 없이 무명에 가까운 시기를 보내며 다작으로 기량을 다짐. 안정된 직장을 버린 이 선택이 1990년대 후반의 도약을 준비한 밑바탕.
리처드 페티와 존 카치오포가 총서 《실험사회심리학의 진전》 제19권에 정교화 가능성 모델을 다룬 장(章)을 발표함. 모델의 핵심 명제와 실증 근거를 학술 총서 형태로 압축해 정리한 글. 같은 해 단행본과 함께 모델을 학계에 확립한 주요 문헌.
리처드 페티와 존 카치오포가 정교화 가능성 모델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단행본 『커뮤니케이션과 설득: 태도 변화의 중심 경로와 주변 경로』를 슈프링거에서 출간함. 모델의 여러 명제와 두 경로, 변인·결과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결정판. 이후 설득 연구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이론적 토대가 된 저작.
1986년 여름부터 약 1년간 영국에서 연수함. 조선일보 출판국장과 현대사연구소장·논설위원실 위원 등을 지낸 뒤 해외 연수를 통해 영국의 정치·사회와 국제정세를 접한 시기임.
위키백과에 의하면 옥스포드 대학교 세인트앤터니 칼리지(St Antony's College)에 갔다고 함.
1983년 신자유클럽이 자민당과 연립을 이룬 뒤, 1986년 신자유클럽을 해산하고 자민당에 복당함. 창당 10년 만에 신당 실험을 접고 보수 본류로 돌아온 결정. 이후 자민당 내에서 본격적인 각료·당직 경력을 쌓는 전환점.
동아수출공사가 수입한 《용형호제》가 국내 상영을 앞두고 등급분류 심의를 마침. 등급분류번호 86-195로 국민학생관람불가 등급을 받았고 상영 판본의 길이는 100분으로 기록. 신정 연휴 개봉 일정에 맞춘 막바지 행정 절차.
존 카치오포와 리처드 페티, 추안펑 카오, 레지나 로드리게스가 인지 욕구의 개인차를 사용해 설득 메시지 처리 방식을 검증함. 인지 욕구가 높은 사람이 주변 단서보다 주장 자체의 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보이며, 인지 욕구를 정교화 가능성 모델의 핵심 개인차 변인으로 연결함.
1986년 9월 법관으로 임관하며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함. 이후 대법원 재판연구관,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등 재판과 연구 요직을 두루 거침. 재판 실무와 사법행정 경험을 함께 쌓아간 시기의 출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