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 황용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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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958건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가 서종철. (~2010년)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 (~2017년)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정치인 남덕우. (~2013년)
영국의 지휘자 네빌 매리너. (~2016년)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김재규. (~1980년)
라울 월시 감독과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제작한 무성 판타지 영화 《바그다드의 도둑 (The Thief of Bagdad)》 개봉. 바그다드와 몽골, 이슬람 건축, 중국풍 의상과 가상의 마법 세계를 하나의 시각적 공간으로 결합한 작품.
중동과 중앙아시아·동아시아의 문화적 차이를 지우고 서구 관객을 위한 화려한 ‘동양’으로 재구성한 대표 사례. 중국계 미국인 배우 애나 메이 웡은 몽골인 노예로 등장해 이국적이고 위험한 동양 여성의 역할을 수행.
이광수가 『동아일보』 1면에 「민족적 경륜」을 5회에 걸쳐 연재함. 정치·산업·교육 분야의 결사를 조직하고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민족의 당면한 권리와 이익을 확보하자고 주장함.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타협적 자치론이라는 비판과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불러왔으며, 이광수가 동아일보사를 떠나는 계기가 된 논설.
『독립신문』이 1924년 1월 1일 제169호부터 한자 제호 ‘獨立新聞’을 한글 ‘독립신문’으로 변경. 1919년 창간호부터 제21호까지 사용한 ‘獨立’, 제22호부터 제168호까지 사용한 ‘獨立新聞’에 이은 세 번째 제호. 김승학 운영 아래 한인 독자를 위한 국문 표기를 제호에 반영한 변경.
이극로가 독일 유학 중이던 1923년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고 무보수로 약 3년간 우리말을 가르침. 이광수의 《허생전》을 한글 교재로 만들어 활용했으며, 이 교재는 오늘날까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됨. 서양에서 이뤄진 한국어 교육의 효시로 평가됨.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재일 조선인 위문반과 현지 조사원들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피살자를 총 6,661명으로 집계해 발표. 도쿄 1,781명, 가나가와현 3,999명 등 지역별 희생 규모를 제시한 조사 결과로, 일본 정부가 집계한 233명과 현격한 차이. 시신 인멸과 조사 방해로 정확한 피해 규모 확정에는 한계가 있으나, 현재까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전체 규모를 논할 때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당대 조사.
이광수가 장백산인이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허생전》 연재를 시작함. 박지원의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허생의 상업 활동과 이상 공동체 건설, 사회 개혁 구상을 대화와 사건 중심의 장편 서사로 확장한 고전 개작.
일본 정부가 1923년 11월 15일 현재 관동대지진 이후 발생한 살상 사건 가운데 조선인 사망자를 233명으로 집계. 사법 당국이 기소 대상으로 파악한 사건을 중심으로 산출한 수치로, 일본 군경이 직접 가담했거나 관헌이 방조한 사건, 기소되지 않은 자경단 학살과 은폐된 희생은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집계. 같은 해 『독립신문』이 발표한 6,661명과 큰 차이를 보이며, 이후 피해 규모와 일본 정부의 축소·은폐 책임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수치.
재일 조선인들이 1923년 10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 위문반’을 조직해 관동 지방의 생존 조선인을 구호하고 학살 피해 조사 착수. 조사원들이 학살 지역을 방문해 희생자 수와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유족과 생존자의 증언을 수집했으나, 시신 은닉과 훼손, 일본 당국의 감시와 조사 방해로 활동에 상당한 제약. 11월까지 이어진 조사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지역별 희생자 집계에 중요한 토대.
1923년 10월 충청 지역 민간은행인 호서은행 대리로 임명되면서 금융인의 길에 들어섬. 이후 서무과장(19241927)과 홍성지점장(19271930)을 지내며 은행 경영 실무에 깊이 관여함. 법조 서기에서 금융인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전환점.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 헌병대원이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여성해방운동가 이토 노에, 오스기의 여섯 살 조카 다치바나 소이치를 연행해 살해한 아마카스 사건 발생. 세 사람의 시신은 헌병대 건물 안 우물에 유기. 관동 대지진 이후의 계엄과 혼란을 이용해 국가가 경계하던 사상운동가와 어린이까지 제거한 관헌 주도의 정치적 살해로, 가메이도 사건 및 조선인 학살과 함께 당시 국가 폭력의 성격을 보여 주는 사건.
지바현 후쿠다무라의 자경단과 주민들이 가가와현에서 온 약품 행상단 15명을 조선인으로 의심해 습격하고, 유아와 임신부를 포함한 9명을 살해한 후쿠다무라 사건 발생. 행상단이 사용하는 사누키 방언과 낯선 말투가 조선인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조선인을 폭도와 범죄자로 지목한 유언비어와 집단적 공포가 일본인에게까지 확장된 학살. 조선인을 살해해도 된다는 인식이 지역사회에 퍼져 있었음을 드러낸 사건.
일본 계엄 당국이 학살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던 9월 5일 무렵 지바현의 군사시설에 나라시노 수용소를 설치하고, 관동 각지에서 연행하거나 이송한 조선인들을 이른바 ‘보호’ 명목으로 집단 수용. 자경단의 공격으로부터 일부 조선인을 격리하는 기능과 함께 조선인을 잠재적 위험 집단으로 분류·감시하는 통제 조치로 작동. 수용된 조선인 가운데 일부가 군 당국에 의해 주변 지역 자경단에 넘겨져 살해된 사실도 이후 지역 조사와 증언을 통해 확인.
9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도쿄 가메이도 경찰서에 구금된 히라사와 게이시치 등 난카쓰노동회 소속 노동운동가 10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된 가메이도 사건 발생. 지진과 계엄령으로 조성된 비상 상황을 이용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한 관헌 주도의 정치적 살해. 조선인을 겨냥한 관민 합동의 대규모 학살과는 피해 대상과 가해 구조에서 차이가 있으나, 관동 대지진 직후 국가 권력이 자행한 일련의 폭력이라는 공통된 역사적 맥락을 지닌 사건.
계엄령 아래 9월 2일부터 6일까지 일본 군대·경찰과 각지에서 조직된 자경단이 관동 지방의 조선인을 대규모로 학살. 군경이 조선인을 검문·연행하거나 직접 살해하고, 죽창·일본도·곤봉·철봉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발음과 말투 등을 이용해 조선인을 가려낸다며 무차별적인 검문과 살해 자행. 경찰서 등으로 피신한 조선인까지 희생되는 가운데 관헌이 자경단의 폭력을 방조하거나 이에 가담.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오인된 일본인도 함께 희생된 사건의 핵심 국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