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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958건

1923 1건
103년 전

원세훈,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개막한 국민대표회의에 노령 한족 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에 가담. 임시정부의 조직과 헌법을 유지하면서 개편하자는 개조파와 대립함.

개조파가 회의에서 이탈한 뒤 창조파는 6월 초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국호를 조선공화국으로 정함. 원세훈과 김규식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창조파 인사들은 새로운 정부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같은 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그러나 이 조직은 소련 정부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해산됨.

김규식 (우사) 국민위원회에 함께 참여한 창조파 인사
1922 15건
104년 전

김승학 운영 아래 『독립신문』 상하이 중문판이 1922년 7월 20일 제1호 발행으로 창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중국 사회와 국제 여론에 알리고, 중국인과의 연대를 넓히기 위한 중국어 신문 발간. 국한문판과 병행해 간행되었으며, 1924년 말까지 약 40호 발행.

이광수가 『개벽』 1922년 5월호에 장편 논설 「민족개조론」을 발표함. 조선 민족의 쇠퇴 원인을 구성원들의 도덕과 성격에서 찾고, 인격 수양·교육·경제적 자립·사회봉사를 통한 전면적 개조를 주장함. 독립보다 민족성 개조와 실력양성을 앞세운 논리로 지식인과 청년층의 강한 비판을 불러온 논설.

이광수 (춘원)

안창호로부터 흥사단의 국내 조직을 결성할 사명을 받고 귀국한 이광수가 김종덕·박현환·김윤경·강창기 등과 함께 서울에서 수양동맹회를 결성함. 청년 남녀의 인격 수양과 민족의 실력 배양을 표방한 국내 흥사단 계열 조직으로, 1926년 평양의 동우구락부와 합동해 수양동우회로 발전.

이광수 (춘원) 창립 주도

은 원자 빔을 비균질 자기장에 통과시키자 빔이 연속적으로 퍼지지 않고 위아래 두 갈래로 갈라짐. 원자의 각운동량(자기 모멘트) 방향이 불연속적인 값만 갖는다는 '공간 양자화(Spatial Quantization)'를 처음으로 직접 보여 준 실험. 훗날 전자 스핀 개념의 실험적 토대가 됨.

양자역학

김규식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 집행위원장으로 참가. 대회에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고 레닌·트로츠키 등과 만나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 서구 열강 중심의 외교 활동에서 벗어나 소련과 피압박민족의 연대를 모색.

1921 4건
105년 전

휴면 상태에 빠졌던 학회(한글모)를 임경재·최두선·이승규 등이 모여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으킴. 주시경 사후 끊어질 뻔한 국어 연구의 맥을 제자들이 이은 것으로, 한글 철자법 연구와 동인지 발간을 중심으로 활동함. 오늘날 조선어학회·한글학회로 이어지는 조직의 직접적 재출발점.

조지 멜퍼드 감독의 《족장 (The Sheik)》 미국 개봉. 루돌프 발렌티노가 사막의 족장 아메드 벤 하산을 연기하고, 유럽 여성을 납치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욕망을 로맨스로 구성한 작품.

사막·천막·부족·납치·성적 지배를 결합한 ‘셰이크 로맨스’의 대중적 확산. 아랍 남성을 야만적이고 관능적인 위협으로 제시하면서도 실제로는 유럽계 혈통이라는 설정을 통해 로맨스의 인종적 금기를 해소한 구조.

일본 영사관의 항의와 프랑스 영사관의 조치로 봉쇄되어 제109호(1921년 5월 31일) 뒤 발행이 중단된 『독립신문』이, 1921년 8월 15일 제110호부터 속간. 김승학 사장 취임 뒤 신문사와 인쇄소의 재개방을 거쳐 발행을 재개했고, 김승학 운영기에는 제110호부터 제177호까지 모두 68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