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타니 노부오 출생
일본의 야구 선수 나카타니 노부오. (~1992년)
일본의 야구 선수 나카타니 노부오. (~1992년)
이광수가 상하이에서 안창호가 창설한 흥사단에 입단함. 흥사단이 내세운 무실역행과 인격 수양·민족 역량 양성의 노선에 참여했으며, 귀국 후에는 흥사단의 국내 조직인 수양동맹회 발기와 수양동우회 통합 과정에 관여함.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위제하. (~2017년)
러시아의 과학자 클리멘트 티미랴제프. (1843년~)
인도의 수학자 스리니바사 라마누잔. (1887년~)
일본의 야구인 니시모토 유키오. (~2011년)
독일의 제6대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2015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지복영. (~2007년)
일본의 배우 미후네 도시로. (~1997년)
1920년 3월 19일 미국 상원이 베르사유 조약 비준안을 7표 차로 부결해 미국의 조약 가입과 국제연맹 참여가 무산됨. 앞서 1919년 11월 19일 표결에서도 윌슨 대통령이 로지 상원의원의 유보 조항을 거부하면서 비준이 좌절. 조약의 집단 안보를 규정한 제10조에 대한 반대가 핵심 쟁점이었으며, 결국 미국은 1921년 독일과 별도 강화 조약을 맺어 베르사유 체제 밖에 머무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아 첫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함. 임시정부 주최 기념식과 교민단 주최 축하식, 시가행진·기념공연 등이 열렸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날을 '국경일'로 부르며 경축함. 임시정부 시기 3·1절의 정식 명칭은 '독립선언일'이었으며, 이날이 해마다 기념되는 민족 명절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 됨.
베르사유조약 발효를 앞두고 1919년 12월부터 나라시노 수용소의 포로 석방과 귀국이 시작됨. 시설 정리를 위해 남았던 20명도 1920년 1월 석방되었고, 칭다오 총독 알프레트 마이어발데크가 부하들의 석방을 확인한 뒤 1월 26일 마지막으로 수용소를 떠남. 제1차 세계대전기 포로수용 기능의 종료.
일본의 압력을 받은 장쭤린 휘하 동북3성 군벌 측 중국 당국이 신흥무관학교를 수색하고 폐쇄 명령. 당시 교장 이세영과 교사 이범석은 삼원보 방면으로 피신.
이 사건은 한족회 해산 명령과 함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에 가해진 중국 관헌의 탄압 일부. 학교는 즉시 완전히 해산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일제·중국 군경의 합동 탄압과 피신을 거쳐 1920년 여름 운영 종료로 이어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언론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설립 과정에 도움을 줬으며 창립 멤버 65명 중 한 명이고, 초기 집행 위원회(national committee) 위원으로 활동.
함석헌이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함. 일제 학교 당국이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해 퇴학당한 것으로 전해짐. 이후 약 2년간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로 일한 뒤 오산학교로 진학함.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국제기구 국제연맹의 규약이 채택되어 창설이 결정. 윌슨이 가장 역점을 둔 구상으로, 강화조약 안에 국제연맹 규약이 포함됨.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표방한 최초의 보편적 국제기구의 출발.
한족회가 설치한 군정부가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로 개편. 이상룡이 독판, 여준이 부독판, 지청천이 사령관을 맡으며 남만주 무장 독립운동의 군정 조직 구성.
신흥무관학교는 서로군정서의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기능. 학교 운영 인사와 졸업생들이 군정서의 지휘부와 군사 조직에 참여하며, 교육기관·자치기관·독립군 조직이 결합한 체제 형성.
프린시페와 소브랄에서 얻은 건판 측정값을 종합해, 태양 가장자리 근처 별빛의 휘어짐이 일반 상대성이론의 예측과 부합한다고 발표함. 채택된 두 주요 측정 결과는 약 1.98초각과 1.61초각으로, 아인슈타인의 예측값 약 1.75초각을 지지함. 이튿날부터 영국과 국제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아인슈타인이 세계적 명사가 되는 전환점이 됨.
창간 이래 한자 제호 ‘獨立’으로 제21호까지 발행하던 신문이 제22호인 1919년 10월 25일부터 ‘獨立新聞’으로 제호 변경. 이 한자 제호는 제168호까지 유지되었고, 제169호인 1924년 1월 1일부터 한글 제호 ‘독립신문’으로 다시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