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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렬

1935 20건
91년 전

홍순언·배구자 부부가 설립한 동양극장이 1935년 11월 1일 개관. 전속극단 조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배구자악극단을 중심으로 《멍텅구리 2세》, 《월급날》, 무용극 《급수부》와 소녀관현악단 연주 등을 편성. 회전무대와 조명·배경 시설을 갖춘 상설 공연장은 영화관 대관에 의존하던 연극계에 새로운 제작 기반을 제공. 이후 전속작가·연출가·배우를 조직하여 대중극을 지속적으로 공연하는 체제로 발전.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군이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방면에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됨.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국제연맹 회원국인 에티오피아를 침공함. 에티오피아는 국제연맹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제재와 집단안보 체제는 침략을 저지하지 못함. 전쟁은 1936년 아디스아바바 함락과 이탈리아의 점령으로 이어졌으며, 전간기 국제질서의 취약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이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에서 에티오피아를 침공. 이탈리아군은 항공기와 기갑전력을 동원해 진격했고 1936년 5월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

에티오피아 정부는 국제연맹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국제연맹은 이탈리아를 침략국으로 판단하고 무기·금융·일부 원자재에 대한 경제제재를 시행. 석유 금수와 수에즈운하 봉쇄는 제재 대상에서 제외.

국제연맹의 실패와 유엔 창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멜바 필립스가 「Note on the Transmutation Function for Deuterons」를 발표함. 중수소핵이 무거운 원자핵과 충돌할 때 중성자가 포획되고 양성자가 방출될 수 있는 핵반응 메커니즘을 분석함. 후대에 이러한 반응이 오펜하이머-필립스 과정으로 불리게 됨.

김규식,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미주대한인독립당 대표들이 결성한 민족혁명당에 창당 주역으로 참여. 제1차 중앙집행위원과 규칙제정위원으로 선출되고 국민부장을 맡음. 민족혁명당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을 포괄하는 민족연합전선 정당을 지향했으나, 의열단계가 당권을 장악하면서 일부 참여 세력이 잇달아 이탈함.

김규식 (우사)

호놀룰루의 무사시야 쇼텐이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에 ‘Aloha shirts—well tailored, beautiful designs and radiant colors’라는 광고를 게재함. 이 광고는 ‘알로하 셔츠’라는 표현이 신문 인쇄물에 등장한 현존 확인 자료상 가장 이른 사례, 또는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됨.

광고는 기성품과 맞춤 제작 셔츠를 모두 95센트부터 판매한다고 알림. 1935~1936년 무렵 하와이 상품 전반에 ‘알로하’라는 표현이 널리 붙기 시작한 흐름 속에서, 셔츠를 가리키는 명칭이 상업적으로 정착해 가는 계기를 보여주는 기록.

1935년 미국 미술관 최초로 영화를 수집·연구·상영하는 부서를 세움. 제작자 존 헤이 휘트니가 초대 위원장을, 영화비평가 아이리스 배리가 초대 큐레이터를 맡아 약 8천 편의 컬렉션을 구축. 영화를 정식 예술 장르로 다룬 선구적 시도로, 1937년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의 표창을 받음.

우석 김종익의 부지 기부를 바탕으로 1935년 4월 25일 도립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5월 15일 순천공립농업학교가 문을 연 사건. 지역의 농업교육을 담당할 학교로 시작한 국립순천대학교의 기원으로, 초기 교육의 중심은 농업 분야 인재 양성이었음. 해방 뒤 순천농림중학교와 순천농림고등학교로 학제가 바뀌었으나, 농림교육을 기반으로 한 학교의 역사는 이후 전문대학과 종합대학교로 이어짐.

아인슈타인·보리스 포돌스키·네이선 로젠은 Physical Review에 「양자역학적 기술은 물리적 실재를 완전하게 기술한다고 볼 수 있는가?」를 발표. 그들은 멀리 떨어진 두 입자가 얽혀 있을 때, 한쪽을 측정하면 다른 쪽 상태가 즉시 결정되는 점을 들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거나 '유령 같은 원격작용'을 허용한다고 주장.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비유는 이 논문의 핵심을 대변하는 표현. 양자 얽힘과 비국소성 논쟁을 촉발한 기념비적 논문. 이 논문은 양자 얽힘과 국소성·실재성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고, 훗날 벨 정리와 아스페 실험으로 이어짐.

경성과 평양의 대항전은 1935년 4월 경기를 치른 뒤 중단되었음. 당시의 과열된 경쟁과 판정 시비, 관중 충돌 등이 대회의 지속을 어렵게 했다고 전해짐.

일제강점기의 사회적 제약도 함께 살펴야 하지만, 모든 중단 원인을 하나로 단정하는 것은 피할 필요가 있음. 이후 다른 도시대항 축구가 열렸다는 사실과 경평 정기전 자체가 계속되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함.

경평축구대항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