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생 박종철,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 경찰의 은폐 시도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가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며 6월 항쟁의 주요 계기 중 하나가 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 중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경찰의 허위 발표와 은폐 조작이 드러나며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 확산. 6월 민주항쟁의 주요 계기 중 하나가 됨.
타임라인
16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이 사건의 축소·은폐 조작에 관여함. 실제 고문 가담자가 5명이었음에도 경찰은 2명만 가담한 것으로 발표하며 책임을 축소하려 했고, 이 조작은 5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무너짐. 박처원은 같은 달 29일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됨.
경찰은 사망 다음날, 박종철이 조사를 받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단순 쇼크사했다고 공식 발표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함.
박종철의 사망 직후 현장에 출동했던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고 증언하며 단순 쇼크사 발표에 의문을 제기함. 이어 부검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가 1월 17일 온몸의 피멍과 폐 손상 등 물고문·전기고문 흔적을 확인함. 경찰의 '쇼크사' 주장을 무너뜨리고 고문치사의 진상을 드러낸 결정적 전환점.
언론 보도와 부검 결과로 의혹이 커지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건 발생 5일 만에 기존 발표를 뒤집고 물고문 등 가혹행위 사실을 공식 시인함. 수사 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함. 다만 가담자를 2명으로만 한정해 이후 드러나는 조직적 축소·은폐의 출발점이 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진 뒤 야당과 재야가 함께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를 열고 추도식과 도심 시위를 벌임. 정부의 원천봉쇄에도 서울·부산 등에서 많은 시민이 추도와 항의에 나섬. 흩어져 있던 반정부 세력이 고문 규탄을 고리로 처음 대규모로 결집한 행동.
박종철군 49재에 맞춰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에서 전개됨. 경찰이 도심 건물 옥상까지 봉쇄했으나 각지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일부 교도소 양심수들은 단식으로 호응함. 2·7 추도대회와 더불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동력을 다진 행진.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은 경찰이 발표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과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수사 간부가 사건 축소·조작에 관여했다고 폭로함.
진실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에게 전달된 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 재야 인사 김정남 등을 거쳐 사제단에 전해짐. 정권이 물고문 사실을 감추고 일부 경찰관만 희생양으로 내세워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임.
폭로 직후 박종철 사건은 다시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5월 18일 폭로로 고문 가담 경관이 5명이며 경찰이 범인을 2명으로 축소해 발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검찰이 사건을 재수사함. 1987년 5월 29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사건 조작 과정에 깊이 관여한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장 박처원 치안감,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을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함.
앞서 경찰은 황정웅·반금곤·이정호 등 은폐됐던 고문 가담 경관 3명의 신병을 확보해 검찰에 넘겼고, 이들은 5월 21일 구속됨. 이로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범인 축소·은폐에 관련된 구속자는 모두 8명으로 늘어남. 대공수사 지휘라인까지 구속되면서 경찰 내부의 조직적 은폐가 공식적으로 확인됨.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87년 9월 21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 축소·은폐에 관여한 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에게 범인도피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함. 함께 기소된 전 대공수사 5과장 유정방과 5과 2계장 박원택에게는 각각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
재판부는 고문 가담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책임자를 두 명으로 축소하고 나머지 가담자들의 도피를 도운 행위를 범인도피로 판단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공작에 대공수사 지휘라인이 직접 관여했음을 사법적으로 처음 인정한 1심 판단.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는 1990년 8월 17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유정방·박원택 전 대공수사 간부에게 무죄를 선고함. 재판부는 이들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은폐·조작하려 했다는 점을 인정할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함.
같은 날 법원은 박종철 사망사건의 수사·발표 과정에서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에게도 무죄를 선고함. 이로써 박종철 사건의 축소·은폐에 대한 치안본부 지휘라인의 형사책임은 항소심에서 한때 전면 부정됨.
검찰은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
대법원은 1991년 12월 27일 박처원·유정방·박원택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함.
대법원은 피고인들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실제 가혹행위 관련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은폐·축소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의 도피를 도왔다는 공소사실을 항소심이 충분한 근거 없이 배척했다고 판단함. 항소심이 관련 경찰관 진술과 피고인들의 검찰 진술을 배척한 데 채증법칙 위반, 사실오인, 범인도피죄 및 공동정범의 공모 법리 오해가 있다고 봄.
이 판결로 1990년 항소심 무죄 판단이 뒤집히고 사건은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으로 돌아감.
1990년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1991년 대법원이 이를 파기환송하자,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는 1993년 2월 27일 파기환송심에서 박처원에게 범인도피죄를 인정해 1심과 같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함.
재판부는 박처원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실제 고문 가담 경관 수를 5명에서 2명으로 축소하고, 관련 경찰관들에게 허위 진술을 하도록 지시해 나머지 가담자들의 도피를 도운 책임이 있다고 판단함.
항소심 무죄로 한때 뒤집혔던 대공수사 지휘라인의 은폐 책임을 다시 인정한 판결.
대법원은 1996년 1월 5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 축소·은폐에 관여한 박처원 전 치안본부 5차장, 유정방 전 대공수사 5과장, 박원택 전 5과 2계장에 대한 유죄를 최종 확정함.
박처원은 실제 고문 가담 경관이 5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2명만 가담한 것처럼 사건을 축소하고, 관련 경찰관들에게 허위 진술을 하도록 지시해 나머지 가담자들의 도피를 도운 범인도피죄가 인정됨. 박처원의 형량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으로 확정됨.
1987년 1심 유죄, 1990년 항소심 무죄, 1991년 대법원 파기환송, 1993년 파기환송심 유죄를 거친 끝에 약 9년 만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공작에 대한 대공수사 지휘라인의 형사책임이 최종 확정.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당시 경찰인권보호센터) 자리에 2008년 6월 10일 박종철기념관이 문을 엶. 당시 신문 기사와 박종철의 친필 편지 등 유품이 전시됨. 국가폭력의 현장을 인권·민주주의 교육의 공간으로 전환한 상징적 조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6월 7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함. 당시 정부가 안기부·내무부·법무부·청와대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최소 두 차례 열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조작한 사실이 확인됨. 권력기관이 국가폭력 사건을 조직적으로 덮으려 한 정황을 국가기구가 공식 규명한 의의.
그 외 사실들
발언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박종철의 고문 사망을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며 내놓은 강민창 치안본부장 등 경찰의 공식 발표. 이후 '탁 치니 억'은 국가의 거짓 해명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