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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의 기록 54건

103년 전.한 해의 기록을 월별로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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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가 작품의 과거를 필요한 순간마다 나누어 드러내는 방식을 자신의 ‘터널링 프로세스(tunnelling process)’라고 일기에 기록함. 현재와 기억을 한 서술 구조 안에서 연결하는 작품의 핵심 구성 원리가 됨.

월트 디즈니가 뉴욕의 영화 배급업자 마거릿 윙클러 측과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 제작·배급 계약을 체결함. 월트와 형 로이 O. 디즈니가 함께 이끌던 디즈니 브라더스 카툰 스튜디오의 사업 기반이 마련됨.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창립일에 해당함. 초기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 사업에서 장편영화·캐릭터·테마파크·미디어 산업으로 확장된 기업 역사의 출발점으로 기록할 가치가 있는 계약.

1923년 10월 29일 앙카라에서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1921년 헌법을 개정하여 국가의 정치체제를 공화국으로 명시하고 무스타파 케말(훗날 아타튀르크)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함. 1922년 술탄제 폐지, 1923년 로잔 평화조약과 앙카라 수도 지정에 이어 오스만 제국의 군주제에서 새 국민국가로 이행한 결정적 사건이며, 1924년 칼리프제 폐지와 신헌법 제정 등 공화국 초기의 제도 개혁으로 이어짐.

재일 조선인들이 1923년 10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 위문반’을 조직해 관동 지방의 생존 조선인을 구호하고 학살 피해 조사 착수. 조사원들이 학살 지역을 방문해 희생자 수와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유족과 생존자의 증언을 수집했으나, 시신 은닉과 훼손, 일본 당국의 감시와 조사 방해로 활동에 상당한 제약. 11월까지 이어진 조사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지역별 희생자 집계에 중요한 토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 정부가 1923년 11월 15일 현재 관동대지진 이후 발생한 살상 사건 가운데 조선인 사망자를 233명으로 집계. 사법 당국이 기소 대상으로 파악한 사건을 중심으로 산출한 수치로, 일본 군경이 직접 가담했거나 관헌이 방조한 사건, 기소되지 않은 자경단 학살과 은폐된 희생은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집계. 같은 해 『독립신문』이 발표한 6,661명과 큰 차이를 보이며, 이후 피해 규모와 일본 정부의 축소·은폐 책임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수치.

이광수가 장백산인이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허생전》 연재를 시작함. 박지원의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허생의 상업 활동과 이상 공동체 건설, 사회 개혁 구상을 대화와 사건 중심의 장편 서사로 확장한 고전 개작.

이광수의 《허생전》은 변 진사에게 만 냥을 빌리는 장면에서 시작해 안성장 과일 매점, 도적들의 규합과 새로운 공동체 건설, 이완과의 문답, 조정 개혁안 제시로 이어지는 서사. 박지원의 고전적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 원작에 없던 인물과 사건을 대폭 늘리고 구어적 서술을 활용해 당대의 민중 독자를 위한 장편소설로 재구성한 작품.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재일 조선인 위문반과 현지 조사원들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피살자를 총 6,661명으로 집계해 발표. 도쿄 1,781명, 가나가와현 3,999명 등 지역별 희생 규모를 제시한 조사 결과로, 일본 정부가 집계한 233명과 현격한 차이. 시신 인멸과 조사 방해로 정확한 피해 규모 확정에는 한계가 있으나, 현재까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전체 규모를 논할 때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당대 조사.

이극로가 독일 유학 중이던 1923년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고 무보수로 약 3년간 우리말을 가르침. 이광수의 《허생전》을 한글 교재로 만들어 활용했으며, 이 교재는 오늘날까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됨. 서양에서 이뤄진 한국어 교육의 효시로 평가됨.

이극로 허생전 강좌 교재로 사용된 작품

R. W. 채프먼이 클래런던 프레스에서 《The Novels of Jane Austen》 학술판을 출간함. 당시 고전 그리스·로마 작가에게 주로 적용되던 수준의 본문 비평과 판본 연구를 오스틴에게 적용한 판본으로, 오스틴을 학술적 정전 작가로 다루는 전환점 가운데 하나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