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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의 기록 8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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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잠정적용의정서에 따라 시행하기 시작한 시점. 관세는 외국에서 들여오는 상품에 붙이는 세금으로, 협정은 이 세금을 낮추기로 한 약속과 수입품을 부당하게 차별하지 않는 규칙을 결합한 틀.

당초 별도의 국제무역기구가 설립될 때까지 사용할 임시 장치였으나, 그 기구가 출범하지 못하면서 장기간 유지된 체제. 따라서 1947년 10월의 서명과 1948년 1월의 적용 시작은 구별되는 단계.

정음사가 윤동주의 시 31편을 수록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을 출간함. 유족과 벗들이 모은 원고를 바탕으로 윤일주가 선별·편집에 참여했으며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실렸음. 생전 단독 시집을 내지 못한 시인의 작품이 한 권의 책으로 독자를 만나게 된 계기임.

3·1절 발포 사건 이후 고조된 도민들의 저항 의식과 미군정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한 상태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미군정의 단독선거 추진에 반대, 총파업과 무장 봉기 발생.

당시 상황

  • 당시 전후 한국의 독립 문제 관련 1946년 11월 14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결의안이 채택
  • 이 결의안을 근거로 유엔은 한국 내 선거와 국회 구성, 정부수립 등의 문제를 지원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1947년 1월 한국에 파견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한반도에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를 추진
  • 소련은 1948년 1월 22일,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입북을 거부
  •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 내에서의 선거 감시를 결정. 즉,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로 최종 결의

당시 김구, 김규식 등은 1947년 말부터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남북 협상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치고 있었음. 단독 선거는 분단의 교착으로 이어지고 이는 미국의 단독 정부 수립 전략이라고 해석하했기 때문. 따라서, 1948년 초부터 파업, 시위, 선거 저지 운동 등 다양한 방법이 준비되고 있었음.

NACA 시험비행사 허버트 H. 후버가 X-1 2호기로 마하 1.029에 도달함. 군 조종사였던 척 예거의 성과에 이어 NACA와 민간 시험비행사에게도 첫 초음속 비행이 되었음.

2호기는 단순히 같은 기록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회·옆미끄럼·승강타 효율 등 조종과 안정성 자료를 수집하는 연구에 사용됐음. 이 조종사는 동명의 미국 대통령과 다른 인물임.

벨 X-1

쿠바 아바나의 유엔 무역고용회의에서 국제무역기구(ITO) 설립을 위한 헌장 문안을 확정한 사건. 상품 거래뿐 아니라 고용·경제개발·투자 등까지 다루려던 전후 국제경제 협력 구상.

헌장 문안을 채택하는 것과 각국이 이를 받아들여 실제 기구가 출범하는 것은 별개의 절차. 헌장은 끝내 발효하지 못했으며, 이미 잠정 적용 중이던 GATT가 상품무역 규칙을 운영하는 중심 틀로 남게 된 배경.

척 예거가 X-1 1호기를 조종하여 이 기체의 최고속도인 마하 1.45에 도달함. 1947년의 음속 돌파 이후에도 1호기가 더 높은 속도에서 안정성과 조종성을 조사하는 시험을 이어갔음을 보여 주는 비행이었음.

후속 X-1 계열의 마하 2 이상 기록과는 구분되는 초기 1호기의 성과임.

벨 X-1

새벽 2시, 남로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 또한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

세계보건기구 설립한 날을 세계 보건의 날 (World Health Day)로 지정. 매년 전 세계 핵심적인 보건 문제를 선정, 이를 위해 한 해 동안 국제적, 지역적, 지방적 행사를 조직하기 위해 제정.

1948년 4월 19일부터 열리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으로 향함. 회의 뒤 김구, 김규식 등이 5월 초 서울로 돌아온 것과 달리 이극로는 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북에 잔류함. 이로써 평생을 바친 한글운동의 무대를 남에서 북으로 옮긴 전환점.

게토 봉기 5주년에 바르샤바의 옛 게토 지역에서 게토 영웅 기념비가 제막됨. 나탄 라포포르트의 조각은 무장 저항과 강제이송의 경험을 서로 다른 면에서 드러냄.

이 기념비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대인의 저항을 기억하는 중심 장소가 됨. 이후 생존자와 시민의 추모, 국제적인 방문과 화해의 상징적 행동이 이어짐.

바르샤바 게토 봉기

김규식, 1948년 4월 21일 원세훈 등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이동.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전체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김구·김일성·김두봉과 남북 지도자 회담을 진행하며 남북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협의함.

남북 지도자들은 외국군 철수, 철수 이후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내전 방지 등에 합의했으나 이를 실행할 제도적 수단을 마련하지 못함.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으며, 남북협상은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분단에 반대한 정치세력의 대표적인 통일정부 수립 시도로 남음.

김규식 (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