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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의 기록 8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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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무장대에 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보도의 ‘지난 22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항공 살포일을 4월 22일로 정리한 내용.

《남선신문》 5월 3일자 《靈峰漢拏의 死火山鳴動》 역시 약 일주일 동안 산기슭 일대에 수차례 전단을 뿌렸으며, 향토의 평화 회복을 위해 손을 잡자는 취지의 김익렬 연대장 전단이 다시 살포됐다고 보도한 기록. 이 기사의 5월 3일은 발행일이고 머리말의 통신 발신일은 5월 2일로, 전단 살포 당일과 구분되는 날짜. 협상 권고와 귀순 요구가 이어진 과정에 관한 당시 보도.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이 대정면 구억리에서 만나 무력 충돌의 중단과 무장대의 하산 방안을 협의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와 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가 1948년 4월 28일로 정리한 회담.

김익렬의 회고를 인용한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합의의 주요 내용은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산발적 충돌은 연락 미달로 간주하되 ‘5일 이후’의 전투는 약속 위반으로 보며, 무장해제는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약속이 깨지면 전투를 재개하며,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내용. 귀순 절차는 회담 다음 날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수용소를 설치하고 서귀포·성산포 등으로 확대하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하는 구상. 서명된 합의문 원본이 아니라 김익렬의 회고에 따라 전해지는 구체 조항.

회담 뒤에도 납치·살해와 5월 1일 오라리 방화, 군정 수뇌부의 공격 방침 등이 이어지며 지속적인 충돌 중단으로 연결되지 못한 협상. 한편 박찬식의 연구는 1948년에 작성·발표된 김익렬의 《참전기》에 회담일이 4월 30일로 적혔다고 지적한 내용으로, 공식 연표의 4월 28일과 날짜 기록의 차이가 남아 있는 사건.

이들은 이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기록. 당시 오라리 지역은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과 좌익 무장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곳. 이 방화사건은 평화회담을 깨고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무장대 측과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 단체의 충돌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피해를 양산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기록.

당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거주하던 대동청년단 단원의 부인 2명은 마을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제주시 읍내로 피신. 이들은 살림살이를 챙기기 위해 잠시 마을로 다시 들어왔다가, 이를 인지한 마을 주민들(무장대 동조 세력)에 의해 납치. 마을 뒷산인 민오름으로 끌려가 이 중 1명은 사망.

1948년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가옥이 불에 탄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앞선 무장대의 우익계 인사·가족 납치와 살해, 장례식 뒤 우익청년단원들의 방화, 이어진 무장대의 청년단 추격과 경찰 출동을 구분하여 서술하고, 가옥 방화는 우익청년단원들의 행위로 판단한 내용.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김익렬 제9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거쳐 경찰의 후원 아래 우익청년단체가 불을 질렀다고 판단하여 보고한 경위. 당시 경찰은 무장대 소행이라고 보고했으며, 김익렬의 조사 결과와 미군정 측 대응의 구체 경위는 그의 회고와 관계자들의 후대 증언을 함께 토대로 정리된 내용.

불타는 마을을 공중과 지상에서 촬영한 미군 영상 《제주도의 메이데이》가 남아 있는 사건. 공식보고서는 이 영상의 구성과 무장대 책임론을 강경 진압 정당화의 맥락에서 분석한 내용이며, 영상의 존재만으로 미군이 방화를 사전에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까지 입증되는 것은 아닌 자료적 한계. 4월 말 협상이 이행되지 못한 과정의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공격 명령과 지휘관 교체까지 이어진 정책 변화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경위.

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김익렬 제9연대장 등이 참석한 수뇌회의. 딘 일행의 이날 제주 방문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전한 당시 신문 보도로도 확인되는 일정.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인용한 김익렬의 회고에 따르면, 김익렬은 무력에 의한 위압과 선무·귀순공작을 병용하고 무장세력과 일반 주민을 구분하며 경찰을 통합 지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입장. 조병옥의 강경 진압 주장과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맞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는 구체 경위는 김익렬의 회고 증언.

김익렬은 다음 날 제9연대장직에서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경과. 당시 방문 보도, 당사자의 후대 회고, 공식보고서의 정책 전환 해석을 서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하는 사건.

1948년 5월 6일 통위부 특명 제52호에 따라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인사. 후임 박진경은 중령으로 취임한 뒤 대령으로 진급한 지휘관.

김익렬이 전날 군정 수뇌회의에서 선무·귀순공작과 경찰 통합지휘를 주장하고 조병옥과 충돌한 뒤 이루어진 교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를 5·10선거를 앞두고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려는 군정 수뇌부의 정책 전환과 연결하여 설명한 내용. 회의 중 충돌만을 유일한 사유로 명시한 인사문서가 확인된 것은 아니며, 연대장직 해임을 군에서의 파면이나 제적으로 확대해서는 안 되는 인사 구분.

후임 박진경의 지휘 아래 진압작전이 확대되고 뒤이어 제11연대 편제로 이어진 부대 개편. 5월 6일의 연대장 교체와 이후의 부대 개편은 서로 구분되는 과정.

05-10 · 월 event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곳 무효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남한 지역에서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됨. 남한에 배정된 200개 의석 가운데 제주 4·3의 영향으로 선거가 무효가 된 북제주 갑·을을 제외하고 198명의 의원이 선출됨. 이승만은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당선되었고, 5월 31일 열린 국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됨.

소련이 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부하면서 남북 총선거가 실현되지 못하자 유엔소총회는 선거 가능 지역에서의 선거를 권고했음.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이를 지지했지만 김구·김규식 등은 분단 고착을 우려해 남북협상을 추진했고, 좌익세력도 단독선거에 반대했음. 총선거는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통일정부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치러졌음.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북제주군 갑, 을의 투표가 원만히 시행되지 못하여, 군정장관에게 무효선포를 건의. 결국 무효 처리됨

  • 북제주군 갑구: 73투표구 중 31개구 투표 (등록유권자 27,560명 투표자 11,912명)
  • 북게주군 을구 -61투표구 중 32개구의 투표 (등록한 유권자 20,917명, 투표자 9,724명)

선거 후 이날까지 제주도의 선거결과만이 국회선거위원회에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고 함.

김규식, 남북협상을 마치고 귀환한 뒤 5·10 총선거에 대해 반대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불반대·불참가’ 입장을 표명.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선거를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노선과는 거리를 둠. 이후 제도권 정부 수립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김구와 함께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계속함.

김규식 (우사)

1948년 5월 국제결제은행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제국은행으로부터 받은 금 가운데 벨기에·네덜란드 중앙은행에서 약탈된 것으로 밝혀진 약 3.7톤을 연합국의 통화용 금 반환위원회에 인도하기로 합의. 독일 제국은행이 금의 출처를 감추기 위해 녹여 재주조했던 사실은 종전 후 조사로 드러난 내용.

같은 과정에서 미국 당국이 BIS 자산 동결을 해제하고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의 BIS 청산 결의를 적용하지 않기로 합의. BIS는 전후 유럽 중앙은행 협력과 다자 결제 업무에 중심을 두며 존속.

1948년 6월 7일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시가 대통령직에서 사임. 같은 해 2월 공산당의 권력 장악 이후 새 공산당 주도 헌법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베네시는 정치적 압박과 건강 악화 속에 퇴임함. 그의 퇴임은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의회민주주의가 공산당 일당지배 체제로 바뀌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