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우편연합의 유엔 전문기구 편입
만국우편연합이 유엔 전문기구가 됨. 1874년부터 존재하던 국제우편 협력기구가 유엔의 사회·경제적 개발 협력체계와 연결된 사건으로, 국제우편 분야의 임무를 유지하면서 다른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확대함.
제헌국회, 태극기를 대한민국 국기로 제정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태극기를 새 나라의 국기로 공식 제정함. 다만 이때까지도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라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함께 쓰임. 대한민국 정부의 국기로서 태극기의 법적 지위가 확립된 시점.
제헌헌법 공포·시행
제헌국회가 의결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을 국회의장 이승만이 서명·공포하고 같은 날 시행한 사건. 헌법안의 국회 의결일은 7월 12일이며, 헌법 제정·공포를 기념하는 제헌절은 7월 17일로 구분되는 연혁.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의 공동안을 심의 원안으로, 권승렬안을 참고안으로 삼아 만든 전문과 10장 103조의 국가 기본법.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 국민의 자유권과 사회적 기본권, 단원제 국회, 대통령·부통령, 사법기관 등을 규정한 국가 운영의 설계.
초안의 의원내각제 구상이 이승만의 대통령제 주장과 조정되면서 대통령중심제에 국무총리제 등의 내각제 요소를 결합한 체제.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가 선출하고 4년 임기에 한 차례 중임을 허용한 방식. 정부 수립에 앞서 국가기관을 구성할 법적 근거를 마련한 헌정의 시작.
대한민국 제1대 정·부통령 선거
제헌헌법에 따라 국회가 무기명투표로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함. 대통령 선거에는 재적의원 198명 중 196명이 참여해 이승만이 180표, 김구가 13표, 안재홍이 2표를 얻었고 무효표는 1표였음.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됨.
부통령 선거는 출석 197명 가운데 1차 투표에서 이시영이 113표를 얻었으나 당선에 필요한 득표수에 미달해 다시 투표했으며, 2차 투표에서 133표를 얻어 당선됨. 당시에는 별도 후보자 등록 없이 의원이 이름을 적는 방식이어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불참 의사를 밝힌 김구에게도 표가 나왔음. 선출일은 7월 20일, 정·부통령 취임식은 7월 24일이며 정부 수립 선포는 8월 15일로 구별됨.
대통령 선거 결과는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표로 총 196표임. 서재필을 적은 1표는 외국 국적 취득을 이유로 무효 처리됨.
부통령 선거 1차 투표는 이시영 113표, 김구 65표, 조만식 10표, 오세창 5표, 장택상 3표, 서상일 1표였음. 2차 투표에서 이시영 133표, 김구 62표, 그 밖의 인물 1표, 무효 1표가 나왔음. 이시영의 133표는 첫 투표 결과가 아니라 당선이 결정된 두 번째 투표의 결과임.
김구와 김규식, 남북협상에 참여한 정당·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상황에서 외세 의존을 배제하고 남북협상을 통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계속 추진한다는 방침을 표방. 남북협상의 성과와 합의를 이어가기 위한 정치적 연대기구로 활동함.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
서울 중앙청 앞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의 취임식이 열림. 7월 20일 국회에서 선출된 뒤 열린 취임식으로, 8월 15일의 정부 수립 선포와는 별개의 절차임.
이승만은 취임사에서 대통령으로서의 책임, 정부 조직, 국가 재건과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설명했음. 헌법과 국회에 근거한 신생 정부의 출범이라는 의미가 있었으나, 남북을 포괄하는 통일정부가 성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취임이었음.
남로당 김달삼 제주도 탈출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및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은 같은 해 8월 21~26일 열리는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 성산포항을 통해 탈출.
김익렬의 《제주참전기》 연재 시작
전 제9연대장 김익렬의 《동족의 피로 물드린 제주참전기》가 산업신문에 1948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연재된 기록. 현재의 국제신문이 당시 기고문을 2019년 재수록하면서 확인한 게재 기간이며, 제주4·3평화재단 교육자료에도 8월 6일자 글로 인용된 기록.
사건 직후 현역 군인 신분으로 발표한 글이라는 점에서 예편 뒤 작성한 《4·3의 진실》 유고와 구분되는 자료. 후대 연구가 협상 날짜 등 두 기록의 차이를 검토하는 데 활용한 당사자 기록.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이승만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됨. 5·10 총선거, 제헌국회 구성, 7월 17일 헌법 공포, 7월 20일 정·부통령 선출과 내각 구성에 이어 이루어진 정부 출범이었음.
해방 직후의 미·소 분할 점령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거치며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는 방향이 굳어졌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한국인의 정부와 헌정체제를 마련한 사건이면서, 9월 9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분단국가 체제가 성립한 과정의 일부임. 이승만이 추진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통일정부를 우선했던 독립운동 동료들과의 결별을 수반했음.
대한노동총연맹으로 개칭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정부 수립 직후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대한노동총연맹으로 명칭을 바꾼 사건. 대한노총이라는 약칭을 유지하면서 선언과 조직 운영 방향을 조정한 전신 단계의 변화. 1954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재편과 구별되는 1948년의 개칭.
대한체육회·대한올림픽위원회로 명칭 변경
조선체육회와 조선올림픽위원회의 명칭을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로 바꿈.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새로운 국호에 맞추어 체육단체의 이름을 정비한 변화임.
국제자연보전연맹 창립
1948년 10월 5일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국제자연보전연맹의 전신인 국제자연보호연맹이 창립됨.
창립 회의에는 정부와 국제기구, 자연보전 단체가 함께 참여했으며, 국가와 시민사회를 한 조직 안에서 연결한 최초의 세계적 환경보전 연합으로 출발함. 이후 IUCN은 종 보전, 보호지역, 자연자원 관리와 IUCN 적색목록 등 국제 자연보전의 기준과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중심 기관으로 발전함.
트루먼 대통령이 NSC 13/2를 승인하여 미국의 안보 이익과 일본의 경제회복을 중심으로 대일 정책을 정리한 사건. 당장의 강화 추진은 서두르지 않되 장차 조약을 짧고 일반적이며 징벌성이 적은 형태로 만들겠다는 방침의 확정. 일본의 산업 재건과 점령 통제 축소를 준비하면서 1951년의 관대한 강화 방식으로 이어지는 정책적 토대 마련.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짐.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
제9연대 진압작전 개시
1948년 11월부터 5개월 동안 진행된 초토화 작전으로 진압군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함. 중산간 마을 134개가 모두 불에 탐. 제주 4.3 사건 희생자의 2/3인 9,700 여명이 초토화 작전으로 목숨을 잃음.
여수·순천 10·19사건 발생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 봉기는 순천 등으로 확대되었고 정부군의 진압 과정에서 군인·경찰뿐 아니라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됨. 발단인 10월 19일과 이후 수일간 이어진 진압 및 민간인 희생을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는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일부 병력이 제주4·3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했음.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주도한 봉기는 여수와 순천 및 전남 동부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도 경찰과 우익 인사 등에 대한 살해가 발생했음. 정부수립 약 두 달 만에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이승만 정부는 군사 진압을 추진했음.
정부는 10월 21일 광주에 토벌 지휘부를 설치하고 22일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음. 정부군이 주요 지역을 다시 장악하는 동안 주민들을 모아 반란 가담자를 가려내는 색출이 진행되었고, 고발이나 지목만으로 법적 절차 없이 처형하는 일이 일어남. 이후 김지회가 지휘를 맡은 반란군 일부는 지리산 등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군·경의 토벌과 주민 희생은 도시 탈환 이후에도 이어짐.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군 내부의 좌익 세력을 제거하는 숙군을 확대하고,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됨. 진압 과정의 민간인 집단희생과 유족에 대한 낙인은 장기간 지속됨.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해설은 정부군의 진압과 부역자 색출을 국가폭력의 구체적 과정으로 설명함.
제로그래피 공정의 공개 시연
할로이드가 디트로이트의 광학 학회 모임에서 새로운 건식 복사 공정을 공개함. 칼슨의 첫 복사 성공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 이루어진 시연으로, 전자사진 기술이 ‘제로그래피’라는 이름으로 대중 앞에 등장한 단계. 당시 공정은 아직 조작이 복잡해 편리한 사무용 기계로 발전시키는 추가 개발이 필요한 단계.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의 제주4·3사건 진압 명령 거부로 시작된 여수·순천 10·19사건이 전남 동부의 여러 지역으로 확대됨. 정부는 10월 22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여수·순천 일대 탈환 작전을 전개함. 뒤이은 군사 진압과 연좌·색출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어 이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대상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