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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의 기록 8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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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메신 거리 7번지에 60석 규모 상영관과 영화박물관을 개관함. 작은 상영 공간은 이후 트뤼포·고다르·리베트 등 젊은 영화인들이 작품을 함께 보고 논쟁하는 장소가 되었음. 영화 보존과 관객의 만남이 새로운 영화 문화를 기르는 토대가 된 시기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제주4·3 진압 과정에서 이승만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음. 정부수립 이후의 강경 진압과 민간인 집단희생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을 보여주는 주요 사건임.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 주둔 제9연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지정했음. 제주4·3은 1947년 3·1절 경찰 발포와 뒤이은 탄압,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봉기 등 미군정기의 사건에서 시작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의 발발 과정과, 8월 15일 이후 이승만 정부가 수행한 진압은 시기와 지휘체계를 구분해야 함.

정부수립 후에는 제9연대장 송요찬의 중산간 통행금지 포고, 마을 소개와 소각, 재판 없는 주민 살해가 확대됨.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와 전남 사건을 철저히 진압하고 가혹한 탄압으로 법의 권위를 세우라는 취지의 강경 방침을 밝힘. 계엄은 1948년 12월 31일 해제되었으나 주민 집단희생은 이후에도 계속됨.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강경 작전을 수행한 제9연대장과 제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계엄 선포와 강경작전 지시를 한 이승만에게 최종 책임을 귀속했음. 이는 대통령의 확인된 정책 지시와 통수 책임에 대한 판단으로, 개별 마을 학살의 현장 명령을 모두 대통령이 직접 내렸다는 뜻과는 구별됨. 보고서는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책임, 무장대의 민간인 살해도 지적했으며, 전 기간의 인명 피해를 잠정적으로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했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그해 평화상을 수여하지 않기로 결정함. 1월 암살된 마하트마 간디에게 사후 수상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상금을 받을 주체와 유언의 취지 등 제도 해석을 둘러싼 문제가 남았던 상황. 당시 규정이 사후 수상을 일률적으로 금지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1974년 이후의 제한 규정을 그대로 적용해 설명할 수 없는 사례. 비폭력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수상하지 못한 이유를 둘러싸고 위원회의 판단 범위와 제도적 한계가 오래 논의된 계기.

노벨평화상

1948년 11월 말 동대신동·서대신동의 옛 일본인 가옥에 살던 260세대 1,424명에게 군부의 퇴거 명령이 내려진 사건. 귀환동포와 기존 주민이 함께 거주하던 공간의 문제로, 해당 수치를 귀환동포만의 인원으로 단정할 수 없는 집계.

유엔 총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결의 217 A(III)로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함. 선언 제1조에서 모든 인간이 존엄과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천명하고, 제2조에서 인종·피부색·성별·언어·종교·출신 등에 따른 구별 없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명시함.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국제연맹 규약에 포함되지 못했던 인종적 비차별 원칙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편적 국제인권 규범의 핵심 원칙으로 명문화되는 흐름을 보여주는 사건.

유엔 총회가 한국 문제를 다룬 결의 195(III)를 채택했음.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감시할 수 있었던 지역의 선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평가한 문서로, 뒤이은 가입 외교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 다만 이 결의가 대한민국의 유엔 회원국 가입을 승인한 것은 아니었음.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약 한 달 보름만에 계엄령 해제. 이 계엄령은 법적 근거 없이 선포된 불법적인 조치였고, 수많은 무고한 희생을 나은 학살의 배경이 됨.

참고로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법률 제69호로 최초로 제정.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선거에 관한 사무를 행정기관인 내무부 산하 '선거위원회'가 관장함. 선거관리기구가 집행부에 소속돼 독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구조였음. 훗날 3·15 부정선거를 거치며 독립된 선거관리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배경이 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한 알프레드 샤힌이 어머니 메리 샤힌의 도움으로 호놀룰루에 자신의 기성복 의류 회사를 설립함. 샤힌은 알로하 셔츠와 여성복을 중심으로, 가족의 맞춤복 사업을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성복 사업으로 확장함.

회사는 이후 ‘Shaheen’s of Honolulu’과 ‘Surf ’n Sand’ 브랜드를 통해 원단 디자인·실크스크린 인쇄·봉제·유통을 한곳에서 처리하는 수직 통합 체제를 구축함. 1949~1950년 수입 원단 공급이 막히자 고물상에서 구한 부품으로 염색·가공 장비를 제작해 자체 직물 생산에 나섰고, 이는 알로하 셔츠를 관광 기념품 수준에서 디자인과 품질을 갖춘 패션 상품으로 끌어올리는 기반이 됨.

알로하 셔츠 (하와이안 셔츠)

뉴욕 맨해튼의 팔라디움 볼룸은 1946년 개장한 뒤 1948년 전후 마치토·티토 푸엔테·티토 로드리게스 등 쿠바·푸에르토리코계 악단 공연을 중심으로 라틴 댄스의 핵심 무대로 자리 잡음. 인종·민족·계층을 넘나드는 관객이 함께 춤을 추는 공간으로 알려졌으며, 쿠바계 맘보가 뉴욕 대도시의 춤 문화로 확산되는 중요한 거점이 됨. 공연장 자체의 개장과 맘보 중심 프로그램의 형성을 구분함.

맘보

그레이엄-뉴먼이 자동차보험사 GEICO 지분에 투자함. 저평가 증권의 분산 매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중요한 기업 투자였으며, 그레이엄을 통해 GEICO에 관심을 갖게 된 워런 버핏의 투자 경력과도 연결됨.

벤저민 그레이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