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중 일본 육군이 1905년 3월 현재의 지바현 나라시노시 히가시나라시노 일대에 러시아군 포로수용소를 개설함. 건물 완공 전에는 포로들이 천막에서 생활했으며, 같은 해 가을 무렵 수용 인원이 약 1만 5천 명에 이름. 훗날 독일군 포로와 관동대지진 뒤 조선인·중국인을 수용한 군사시설 일대의 첫 대규모 수용 단계.
나라시노 수용소
일본 지바현의 옛 육군 수용시설. 19051906년 러시아군 포로 약 1만 5천 명을 수용한 뒤, 19151920년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로수용소로 다시 운영됨.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에는 조선인·중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의 집단 수용시설로 재가동되었으며, 수용자 일부가 일본군의 조사·살해와 인근 마을로의 인계 뒤 희생된 사실이 지역 조사와 연구를 통해 밝혀진 장소.
추가 정보
세 차례의 수용시설 운영
나라시노 수용소는 현재의 지바현 나라시노시 히가시나라시노 일대에 있었던 일본 육군 수용시설. 나라시노 연습장과 다카쓰 병영 일대의 시설이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관동대지진이라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수용 목적으로 반복 사용됨.
러시아군 포로수용소(1905~1906)
러일전쟁 중인 1905년 3월 러시아군 포로수용소로 처음 개설됨. 초기에는 건물이 완성되지 않아 포로들이 천막에서 생활했으며, 같은 해 가을 무렵 수용 인원이 약 1만 5천 명에 이름. 강화 뒤인 11월부터 송환이 시작되어 1906년 1월 폐쇄됨. 이후 시설은 나라시노 연습장을 이용하는 일본군 부대의 임시 숙소인 다카쓰 병영으로 전환됨.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로수용소(1915~1920)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칭다오 전투 등에서 포로로 잡은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병을 수용하기 위해 1915년 9월 다시 운영됨. 현재의 히가시나라시노 남동부에 별도 수용시설이 세워졌고, 최대 약 1천 명이 생활함. 포로들은 막사와 정원·채소밭을 만들고 음악·연극·체육 활동을 함.
1918년 일본 농상무성은 독일식 소시지 제조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축산시험장 기사 이이다 요시후사를 수용소에 파견함. 수용 중인 카를 얀 등 독일인 기술자 5명에게 식육가공 시험을 수행하게 하고 제조법을 습득함. 나라시노시 자료는 얀이 처음에는 비법 공개를 주저했으나 수용소장 사이고 도라타로의 설득 뒤 응했다고 전함. 물리적 강제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포로와 수용 당국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진행된 만큼 자발적인 기술 교류로 단정하기 어려움. 농상무성은 확보한 제조법을 강습회를 통해 일본 각지의 식육가공업자에게 보급함.
1918년 말부터 유행한 인플루엔자로 포로 25명과 수용소장 사이고 도라타로가 사망함. 1919년 12월 석방이 시작되어 마지막 포로가 1920년 1월 26일 떠남.
관동대지진 뒤 조선인·중국인 수용(1923)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방화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고 계엄이 시행된 가운데, 옛 군사시설이 조선인·중국인 집단 수용소로 다시 쓰임. 당시 공식 명칭은 식민지 차별어가 포함된 ‘육군 나라시노 지선인 수용소(陸軍習志野支鮮人収容所)’였음. 9월 4일 설치된 뒤 3,700명이 넘는 조선인·중국인이 ‘보호’ 명목으로 이송된 것으로 연구됨.
수용은 자경단의 공격에서 일부 사람을 격리하는 기능과 함께 조선인을 잠재적 위험집단으로 분류·감시하는 통제 조치로 작동함. 증언과 연구에 따르면 군은 수용자 가운데 일부를 조사·선별해 수용소 안에서 살해했으며, 9월 7일 이후에는 일부 조선인을 다카쓰·오와다신덴·가야타 등 인근 마을에 넘김. 주민 일기와 증언은 인계받은 사람들을 자경단과 주민들이 살해한 경과를 전함.
조사와 추모
공문서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인계 학살의 실태는 1976년 나라시노시립 제4중학교 향토사연구회의 주민 증언 조사에서 본격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함. 1978년 지역 주민 등을 중심으로 추도·조사실행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증언과 일기를 수집한 조사 성과가 1983년 《이유 없이 살해된 사람들》로 출간됨. 같은 해부터 다카쓰 주민·관음사·실행위원회가 공동으로 합동 위령제를 열기 시작함.
1998년 야치요시 다카쓰의 ‘나기노하라’에서 지역 주민과 조사실행위원회가 조선인 희생자 6명의 유골을 발굴함. 유골은 화장 뒤 이듬해 다카쓰산 관음사에 안치되었고, 1999년 9월 5일 제17회 합동 위령제에서 공동 위령비가 세워짐. 2019년에는 나라시노시가 독일군 포로의 일기·사진·보틀십 등 관련 자료 132점을 시 지정문화재로 지정함. 시민사회의 조사·추모와 지방자치단체의 기록 보존이 서로 다른 수용소의 역사를 현재로 이어가는 구조.
타임라인
16러일 강화 뒤인 1905년 11월 러시아군 포로 송환이 시작되고, 나라시노 포로수용소가 1906년 1월 폐쇄됨. 수용소 건물과 부지는 이후 나라시노 연습장에 온 일본군 부대의 임시 숙소인 다카쓰 병영으로 이용됨. 1915년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로 수용으로 이어지는 시설 전환.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칭다오 전투 등에서 포로로 잡은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병을 수용하기 위해 1915년 9월 나라시노 포로수용소를 가동함. 도쿄 아사쿠사 혼간지와 후쿠오카·구루메·시즈오카·오이타의 수용소에서 장병들이 이송되었으며, 최대 약 1천 명이 생활함. 러일전쟁 뒤 다카쓰 병영으로 바뀐 군사시설 일대가 다시 포로 수용에 사용된 시기.
1918년 2월 일본 농상무성이 독일식 소시지 제조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축산시험장 기사 이이다 요시후사를 나라시노 포로수용소에 파견함. 수용 중인 카를 얀 등 독일인 기술자 5명에게 식육가공 시험을 수행하게 하고 제조법을 습득함. 나라시노시 자료는 얀이 처음에는 비법 공개를 주저했으나 수용소장 사이고 도라타로의 설득 뒤 응했다고 전함. 물리적 강제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포로와 수용 당국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진행된 만큼 자발적인 기술 교류로 단정하기 어려움. 농상무성은 확보한 제조법을 강습회를 통해 일본 각지의 식육가공업자에게 보급함.
1918년 말 나라시노 포로수용소에 인플루엔자가 유행해 독일군 포로 25명이 사망함. 수용소장 사이고 도라타로도 1919년 1월 1일 고열에도 신년 인사를 위해 수용소를 찾은 뒤 같은 날 사망함. 사망한 포로 25명은 수용 중 다른 원인으로 숨진 5명과 함께 현재의 후나바시 시영 나라시노 영원에 안장됨.
베르사유조약 발효를 앞두고 1919년 12월부터 나라시노 수용소의 포로 석방과 귀국이 시작됨. 시설 정리를 위해 남았던 20명도 1920년 1월 석방되었고, 칭다오 총독 알프레트 마이어발데크가 부하들의 석방을 확인한 뒤 1월 26일 마지막으로 수용소를 떠남. 제1차 세계대전기 포로수용 기능의 종료.
1923년 9월 4일 일본 육군이 나라시노의 옛 군사시설에 조선인·중국인 수용시설을 설치함. 당시 공식 명칭은 식민지 차별어가 포함된 ‘육군 나라시노 지선인 수용소(陸軍習志野支鮮人収容所)’였음. 관동대지진 뒤 계엄체제에서 조선인·중국인을 대규모로 이송·관리하기 위한 시설의 설치.
일본 계엄 당국이 1923년 9월 5일 무렵부터 관동 각지에서 연행하거나 이송한 조선인·중국인을 나라시노 수용소에 집단 수용함. 3,700명이 넘는 사람이 수용된 것으로 연구되며, 자경단의 공격에서 일부를 격리하는 기능과 조선인을 잠재적 위험집단으로 분류·감시하는 통제 기능이 함께 작동함. 수용자 일부가 이후 군의 조사·살해와 인근 마을로의 인계 뒤 희생됨.
1923년 9월 7일부터 9일까지 일본군이 나라시노 수용소의 조선인 일부를 다카쓰·오와다신덴·가야타 등 인근 마을에 넘김. 주민 일기와 전후 증언에 따르면 각 지역의 자경단과 주민들이 인계받은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다카쓰에서는 6명의 희생이 확인됨. 군이 ‘보호’ 수용자를 민간에 인계하고 지역 주민의 살해가 뒤따른 사건.
전후 수집된 증언과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 당국이 나라시노 수용소의 조선인 수용자 가운데 ‘사상이 이상하다’고 본 사람들을 영창에 가두고, 조선어에 능한 헌병 등을 수용자 사이에 투입해 조사함. 이 과정에서 일부가 이른바 ‘적당 처분’의 대상으로 분류되어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살해된 것으로 지적됨. ‘보호’ 명목의 수용이 감시·선별·살해와 함께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나라시노시립 제4중학교 향토사연구회가 1976년 여름 오와다신덴 등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관한 주민 증언을 조사함. ‘보호’를 위해 나라시노 수용소에 수용된 조선인 일부가 군에 의해 주변 마을로 넘겨지고 주민들에게 살해·매장되었다는 증언을 수집함. 공문서만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나라시노 수용소 인근 학살을 지역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규명하는 출발점.
1978년 지역 주민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지바현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실행위원회가 나라시노 수용소와 주변 마을의 학살에 관한 증언·일기·자료를 조사하고, 그 성과를 1983년 《이유 없이 살해된 사람들―관동대지진과 조선인》으로 출간함. 같은 해부터 다카쓰 주민·다카쓰산 관음사·실행위원회가 공동으로 합동 위령제를 개최함. 1976년 중학생들의 주민 증언 조사가 지속적인 시민 조사와 추모 활동으로 발전한 전환점.
1998년 9월 지역 주민의 증언과 주민 일기를 토대로 야치요시 다카쓰의 학살 현장 ‘나기노하라’를 발굴함. 지바현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실행위원회와 다카쓰 주민이 함께 참여해 조선인 희생자 6명의 유골을 확인함. 1970년대부터 이어진 지역 조사가 물적 흔적의 확인으로 이어진 계기이며, 유골은 화장 뒤 이듬해 다카쓰산 관음사에 안치됨.
다카쓰 주민과 다카쓰산 관음사, 지바현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실행위원회가 1999년 9월 5일 관음사 경내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를 세움. 전년에 발굴·화장한 희생자 6명의 유골을 안치하고, 1983년부터 이어진 제17회 합동 위령제에서 비석을 제막함. 이후 합동 위령제가 매년 9월 위령비 앞에서 이어지는 지역 기억의 거점.
나라시노시가 2019년 9월 에리히 카울의 일기와 사진, 요하네스 위버샤르가 소장했던 사진, 포로들이 제작한 보틀십 등 독일군 포로 관련 자료 3건 132점을 시 지정문화재인 역사자료로 지정함. 포로의 생활과 지역 주민과의 접촉을 보여주는 기록이 지방자치단체의 공식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기 시작한 계기.
2023년 9월 9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아 야치요시 다카쓰산 관음사의 위령비 앞에서 추도식이 열림. 재일동포와 일본 시민 등 약 140명이 참석해 희생자를 추모하고, 나라시노 수용소에서 인근 마을로 넘겨진 조선인들이 살해된 역사를 되새김. 1983년부터 주민·사찰·조사실행위원회가 공동으로 이어온 합동 추도 활동의 100주년 행사.
그 외 사실들
기록
나라시노 수용소는 제1차 세계대전기 최대 약 1,000명의 독일·오스트리아군 포로를 수용한 시설이었음.
출처: 나라시노시1923년 관동대지진 뒤 나라시노 수용소에 조선인 약 3,200명과 중국인 약 600명이 '보호' 명목으로 이송된 것으로 연구됨.
출처: 국립국회도서관 수록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