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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청문회에서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개인정보위·경찰·민관합동조사단이 3,300만 명 이상의 이름·이메일 유출을 확인했다'며 '약 3,000건'이라는 쿠팡 주장을 정면 반박함. 김범석 의장과 강한승 전 한국쿠팡 대표 등 핵심 인사의 불출석에 의원들의 질타가 쏟아졌고, 해리 로저스 임시 대표가 증인으로 출석함.

쿠팡이 김범석 사과 직후 총 1조6,850억 원 규모, 1인당 5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2026년 1월 15일부터 지급하겠다는 보상안을 발표함. 그러나 상품권이 쿠팡·쿠팡이츠·쿠팡트래블·알룩스 4종으로 쪼개져 본 쇼핑에 즉시 쓸 수 있는 금액은 5,000원뿐인 점이 드러나며 '생색내기·꼼수 쿠폰'이라는 비판이 거세짐.

미국에 거주하는 쿠팡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 김범석이 한국어 입장문으로 유출 사태에 대해 처음 사과하고 보상안 마련과 재발 방지 투자·개혁을 약속함. 그간 국회 청문회에 잇따라 불출석해 거센 비판을 받아온 끝에 나온 사과로, 진정성 논란이 이어짐.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라며 약 3,300만 계정에 접근한 것은 전직 직원이고 그가 실제 저장한 기록은 약 3,000건에 불과하며 제3자에게 전송한 정보는 없다고 발표함. 그러나 정부·국회·민관합동조사단이 확인한 3,000만 명대 유출 규모와 크게 어긋나 '책임 회피·축소'라는 비판을 키움.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기업의 개인정보 관리 소홀에 대한 처벌 강화를 촉구함. 개인정보 보호를 AI·디지털 시대의 핵심 자산으로 규정하고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 법 위반을 밥 먹듯 한다'며 징벌적 과징금 상향을 위한 시행령 즉시 개정을 지시함. 이 지시가 이후 역대 최대 과징금 산정의 배경이 됨.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쿠팡에 이용자 대상 통지를 정정하라고 요구함. 쿠팡이 사고를 '노출(exposure)'로 표현한 데 대해 실제로는 '유출(leak)'이 발생했음을 명시하도록 함. 쿠팡의 사고 규모·성격 축소 표현을 둘러싼 논란이 본격화한 계기.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건

쿠팡이 약 3,370만 개 회원 계정의 개인정보가 외부로 유출됐다고 처음으로 공개함. 유출 정보에는 이름·이메일·전화번호·주소·주문정보 등이 포함됐으나 결제·카드정보, 로그인 정보는 유출되지 않았다고 밝힘. 인구 5,160만 명의 한국에서 사실상 회원 대부분이 영향을 받은 셈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로 기록됨.

2024년 11월 퇴사한 쿠팡 전직 엔지니어가 재직 당시 접근 가능했던 내부 인증 서명키를 이용해 회원정보 수정 페이지·배송지 관리 페이지에 무단 접근을 시작함. 정부 합동조사에 따르면 무단 접근은 2025년 4월 14일부터 11월 8일까지 이어졌고 2025년 1월경 시도된 흔적도 발견됨. 쿠팡이 업무상 불필요한 직원도 서명키를 평문으로 열람하게 했고 퇴사 후에도 키를 폐기·교체하지 않은 기본적 관리 부실이 드러남.

한글날에 마지막 6권을 펴내며 『큰사전』 편찬 사업을 마무리함.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직 이후 조선어학회 사건과 6·25 전쟁을 견뎌낸 28년 만의 완간으로, 총 16만 4125개 어휘 수록. 민족의 손으로 완성한 첫 한국어 대사전.

광복 뒤 정기총회 결의로 학회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꿈. 1908년 국어연구학회에서 출발해 배달말글몯음·한글모·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로 이어진 이름이 오늘의 한글학회로 정착됨. 이후 한글 전용 운동과 우리말 사전 편찬 등 우리 말글 진흥 사업을 이어감.

한글날에 맞춰 『조선말 큰사전』 1권을 펴냄. 1929년 편찬회 조직 이후 18년 만에 나온 첫 결실로, 우리 민족의 손으로 만든 첫 한국어 대사전의 출발. 이후 1949년 2권이 이어지고 학회 개칭 뒤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완간됨.

조선어학회 사건의 재판 증빙 자료로 경성고등법원에 보내졌던 사전 원고가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화물 창고에서 발견됨. 10여 년에 걸친 어휘 수집과 집필의 결실이 사라질 뻔하다 극적으로 돌아온 것. 이 원고를 바탕으로 『큰사전』 간행이 재개되었으며, 원고는 뒷날 국가지정기록물 제4호로 지정됨.

상고가 8월 13일 기각되었으나 이틀 뒤 광복을 맞아 8월 17일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4명이 풀려남. 석방된 회원들은 곧바로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되살림. 중단되었던 우리말 사전 편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

1944년 12월부터 9차례 이어진 공판 끝에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등을 선고함. 사전 편찬을 민족운동의 형태로 규정한 예심 결정에 따라 치안유지법 내란죄가 적용됨. 학문 활동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처벌한 판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국어학자 이윤재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서 고문과 추위·굶주림 끝에 순국함. 한글 보급 운동과 조선어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친 학자로, 사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옥중에서 생을 마침. 조선어학회 사건의 비극을 상징하는 죽음.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10월 1일 이중화·장지영·최현배 등 11명을 시작으로 회원과 후원자들을 잇달아 검거함. 1943년 4월까지 33명이 붙잡혀 치안유지법 내란죄로 몰렸고, 사전 편찬 원고와 서적은 모두 압수됨. 학회 활동과 『큰사전』 편찬이 전면 중단된 일제 말기의 대표적 민족 탄압 사건.

발단

1942년 여름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조선말로 대화하다 조선인 경찰에게 적발되어 취조를 받음. 일제는 학생들에게 민족주의적 감화를 준 인물로 조선어사전 편찬원 정태진을 지목하고, 9월 5일 그를 연행해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 단체라는 자백을 받아냄.

전개

10월 1일 이중화·장지영·최현배 등 11명이 서울에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된 것을 시작으로,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고 48명이 증인으로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음. 홍원경찰서는 사전 편찬 가담자와 재정 후원자 전원을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고, 이극로·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승·한징 등 16명이 기소되어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됨.

결과

수감 중 이윤재(1943년 12월)와 한징(1944년 2월)이 고문과 추위·굶주림 속에 옥사함. 1945년 1월 함흥지방재판소는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등 실형을 선고함.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한다'며 사전 편찬 자체를 민족운동으로 규정한 판결로, 학회는 사실상 해산되고 『큰사전』 편찬도 중단됨.

조선어학회 이극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