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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8,016

정렬

1978 1건
48년 전

당시 안양영화예술학교 교장이던 최은희는 영화 제작 합작 및 투자 논의를 구실로 홍콩에 초청받음. 1978년 1월 14일, 홍콩 리펄스 베이 해변을 산책 중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강제로 보트에 탑승. 공해상에 대기 중이던 북한 화물선으로 옮겨져 남포항을 통해 북한으로 납북.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계획. 북한의 김정일이 낙후된 북한 영화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벌인 일로 알려짐.

1977 19건
49년 전

공업기술연구원(ITRI)이 미국 RCA에서 이전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대만 최초의 집적회로 시험생산공장을 가동. 가동 뒤 약 6개월 만에 수율을 70%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공정 운용과 양산 경험을 축적. 이후 UMC와 TSMC로 이어질 기술·인력 기반의 형성.

대만의 반도체 외교

보건교육복지부가 사회보장청과 사회재활서비스국에 흩어져 있던 메디케어·메디케이드 운영 기능을 모아 의료재정청(HCFA)을 신설함. 두 공적 의료보장 프로그램의 지불·인증·규제 권한을 한 기구로 통합해 지출 관리와 기준 설정의 일관성을 확보하려는 조직 개편. 이 기구가 2001년 메디케어·메디케이드 서비스 센터로 개칭되며 오늘날 CMS의 직접적 전신이 됨.

메디케이드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음. 정신생리학을 기반으로 태도·설득 연구를 본격화하는 학문적 출발점. 이후 사회 과정과 신체 생리를 잇는 연구로 확장하는 토대가 됨.

존 카치오포

보니 타일러가 'It's a Heartache'를 발표함. 특유의 거칠고 허스키한 음색을 전면에 내세운 곡으로 영국 싱글 차트 4위, 미국 빌보드 핫100 3위에 오르는 등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 'Lost in France'가 영국에서 타일러를 알린 곡이었다면 'It's a Heartache'는 그의 이름과 목소리를 국제적으로 각인시킨 첫 대표곡으로 자리잡음.

1977년 11월 22일 명동성당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58호로 지정됨. 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최초의 대규모 고딕 양식 벽돌 성당이라는 건축사적 가치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성을 공인받음. 이후 건물의 보존·복원 관리가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근거가 됨.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연방정부 지원 전미여성회의에 대표·연설자로 참여해 ERA, 재생산의 자유, 소수자 여성의 권리 등 전국 행동계획 논의에 힘을 보탬.

회의에는 각 주와 준주에서 선출된 대표 약 2천 명과 수많은 참관인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평등권 수정헌법, 보육, 고용, 가정폭력, 장애여성·성소수자·소수인종 여성의 권리 등을 포괄한 전국 행동계획을 채택했다.

스타이넘은 회의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의제는 다양한 여성 집단의 협상과 갈등을 통해 형성되었다. 동시에 보수 진영은 별도 집회를 열어 ERA와 낙태권에 반대했고, 이후 미국 성정치의 양극화가 뚜렷해졌다.

연방준비제도개혁법이 제정돼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장기적으로 최대 고용, 물가 안정, 적정한 장기금리를 촉진하도록 연방준비법 제2A조에 명시함. 최대 고용과 물가 안정이라는 연준의 이른바 ‘이중 책무’를 법률로 확립한 제도적 전환점.

소말리아 메르카의 병원 조리사 알리 마오 말린에게 천연두 발진이 나타남. 세계적으로 확인된 마지막 자연발생 천연두 사례로 기록됨. 이후 세계 각지에서 감시와 검증이 이어짐.

종두법

샘 닐이 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장편영화 《Sleeping Dogs》에서 주연을 맡음. 정치적 혼란에 빠진 가상의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평범한 남성이 국가와 저항세력 사이의 갈등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첫 개봉. 《Sleeping Dogs》는 뉴질랜드 영화 산업의 새로운 흐름을 알린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며, 미국에서 개봉한 최초의 뉴질랜드 제작 장편영화가 됨. 이 작품을 통해 샘 닐과 로저 도널드슨의 국제적 경력도 본격적으로 시작됨.

샘 닐

프랑스 마르세유 보메트 교도소에서 하미다 장두비에 대한 사형이 단두대로 집행. 프랑스에서 실제로 시행된 마지막 사형이자, 국가 형벌로서 단두대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기록.

이후 프랑스에서는 사형 집행이 재개되지 않았고,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 아래 사형제 폐지 법률이 제정되어 법적으로도 사형이 폐지됨. 1977년의 마지막 집행과 1981년의 제도 폐지가 연결되는 프랑스 형벌·인권 정책 변화의 중요한 기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