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후네 도시로 출생
일본의 배우 미후네 도시로. (~1997년)
일본의 배우 미후네 도시로. (~1997년)
1920년 3월 19일 미국 상원이 베르사유 조약 비준안을 7표 차로 부결해 미국의 조약 가입과 국제연맹 참여가 무산됨. 앞서 1919년 11월 19일 표결에서도 윌슨 대통령이 로지 상원의원의 유보 조항을 거부하면서 비준이 좌절. 조약의 집단 안보를 규정한 제10조에 대한 반대가 핵심 쟁점이었으며, 결국 미국은 1921년 독일과 별도 강화 조약을 맺어 베르사유 체제 밖에 머무름.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오전 8시 30분 무렵 진명여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독립만세 시위. 배화여학교 등 서울 여학교 학생들이 함께 준비한 기념 시위에 맞춰 동시 행동에 참여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함. 수감자들이 이에 호응했으며, 이후 유관순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아 첫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함. 임시정부 주최 기념식과 교민단 주최 축하식, 시가행진·기념공연 등이 열렸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날을 '국경일'로 부르며 경축함. 임시정부 시기 3·1절의 정식 명칭은 '독립선언일'이었으며, 이날이 해마다 기념되는 민족 명절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 됨.
베르사유조약 발효를 앞두고 1919년 12월부터 나라시노 수용소의 포로 석방과 귀국이 시작됨. 시설 정리를 위해 남았던 20명도 1920년 1월 석방되었고, 칭다오 총독 알프레트 마이어발데크가 부하들의 석방을 확인한 뒤 1월 26일 마지막으로 수용소를 떠남. 제1차 세계대전기 포로수용 기능의 종료.
일본의 압력을 받은 장쭤린 휘하 동북3성 군벌 측 중국 당국이 신흥무관학교를 수색하고 폐쇄 명령. 당시 교장 이세영과 교사 이범석은 삼원보 방면으로 피신.
이 사건은 한족회 해산 명령과 함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에 가해진 중국 관헌의 탄압 일부. 학교는 즉시 완전히 해산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일제·중국 군경의 합동 탄압과 피신을 거쳐 1920년 여름 운영 종료로 이어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언론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설립 과정에 도움을 줬으며 창립 멤버 65명 중 한 명이고, 초기 집행 위원회(national committee) 위원으로 활동.
여성 지식인들의 독립운동 관련 모임과 활동에 관여하여 체포되고 수개월 동안 수감됨. 구체적인 시위 참여와 세부 행적에는 자료별 차이가 있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명순이 전영택의 소개로 1919년 『창조』 동인에 참여했다고 설명.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도 동인 참여 연도를 1919년으로 기재.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창조』 항목은 김명순의 참여를 제7호부터로 구분.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기록된 제7호 발행일은 1920년 7월 25일.
1919년은 동인 참가 연보상의 연도이며, 실제 지면 참여는 1920년 제7호부터 확인
함석헌이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함. 일제 학교 당국이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해 퇴학당한 것으로 전해짐. 이후 약 2년간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로 일한 뒤 오산학교로 진학함.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국제기구 국제연맹의 규약이 채택되어 창설이 결정. 윌슨이 가장 역점을 둔 구상으로, 강화조약 안에 국제연맹 규약이 포함됨.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표방한 최초의 보편적 국제기구의 출발.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서 출생. 훗날 희곡·시나리오·방송극을 집필하며 한국 전후 문학과 영화·방송에 참여한 작가.
한족회가 설치한 군정부가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로 개편. 이상룡이 독판, 여준이 부독판, 지청천이 사령관을 맡으며 남만주 무장 독립운동의 군정 조직 구성.
신흥무관학교는 서로군정서의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기능. 학교 운영 인사와 졸업생들이 군정서의 지휘부와 군사 조직에 참여하며, 교육기관·자치기관·독립군 조직이 결합한 체제 형성.
프린시페와 소브랄에서 얻은 건판 측정값을 종합해, 태양 가장자리 근처 별빛의 휘어짐이 일반 상대성이론의 예측과 부합한다고 발표함. 채택된 두 주요 측정 결과는 약 1.98초각과 1.61초각으로, 아인슈타인의 예측값 약 1.75초각을 지지함. 이튿날부터 영국과 국제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아인슈타인이 세계적 명사가 되는 전환점이 됨.
네이처 창간 50주년 다음 날 리처드 그레고리가 노먼 로키어의 뒤를 이어 공식 편집장이 됨. 이미 실무 편집을 맡아 온 그레고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과 산업, 노동, 국가 재건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방향으로 지면을 발전시킴. 연구 결과 소개에 더해 주요 사회·과학 쟁점을 정기 사설로 논하는 관행이 강화되었으며, 종합 과학지와 과학 언론이라는 두 성격이 함께 뚜렷해진 변화.
창간 이래 한자 제호 ‘獨立’으로 제21호까지 발행하던 신문이 제22호인 1919년 10월 25일부터 ‘獨立新聞’으로 제호 변경. 이 한자 제호는 제168호까지 유지되었고, 제169호인 1924년 1월 1일부터 한글 제호 ‘독립신문’으로 다시 변경.
D. W. 그리피스 감독의 무성영화 《흩어진 꽃잎 (Broken Blossoms)》 미국 개봉. 백인 배우 리처드 바설메스가 런던에 거주하는 중국인 남성을 연기하고, 학대받는 백인 소녀를 보호하다 비극을 맞는 인물로 묘사한 작품.
《치트》의 위협적인 아시아 남성과 달리 온순하고 희생적인 중국인 남성을 제시했으나, 인물을 고유한 이름보다 ‘황인종 남자’로 지칭하고 동양인을 수동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처리한 한계. 적대적 황화론과 동정적 오리엔탈리즘이 서로 다른 형태로 공존한 사례.
김성수가 설립 작업을 주도한 경성방직주식회사가 설립됨. 자본금 100만 원 규모로 출범해 조선인 자본에 의한 근대 면방직 기업의 한 사례가 됨.
상하이·한성·연해주 등에서 구성된 임시정부 계통이 통합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 체제가 성립함. 안창호는 정부 통합을 적극 추진하고 새 체제에서 노동국총판 등을 맡아 임시정부 운영에 참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