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천주교 수녀, 시인 이해인.
오펜하이머·엔리코 페르미·아서 콤프턴·어니스트 로런스로 구성된 임시위원회 과학패널이 원자폭탄의 최초 사용 문제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함. 과학자들의 의견이 기술적 시범부터 직접 군사 사용까지 갈렸음을 밝히면서, 전쟁을 종결할 가능성이 있는 순수한 기술 시범을 제시하지 못했고 직접적인 군사 사용에 대한 수용 가능한 대안도 찾지 못했다는 입장을 밝힘.
50개국 대표,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헌장 서명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가 폐막하며 50개국 대표가 국제연합 헌장에 서명. 헌장은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 국가 간 우호관계 발전, 국제협력과 인권 존중을 기구의 목적으로 규정.
총회·안전보장이사회·경제사회이사회·신탁통치이사회·국제사법재판소·사무국의 6개 주요 기관을 설치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지위와 표결 절차를 명시. 헌장은 각국의 비준을 거쳐 1945년 10월 24일 발효.
헨리 스팀슨 미국 전쟁장관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일 경고와 전후 처리 구상을 담은 메모 및 선언 초안을 제출한 일. 일본 본토 침공의 큰 피해를 피할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항복과 점령·비군사화의 조건을 미리 알리자는 제안. 최종 승인된 문서가 아니라 포츠담 회담을 앞둔 검토안으로, 이후 선언의 형성 과정을 보여 주는 사료.
오펜하이머가 이끈 로스앨러모스, 트리니티 핵실험 성공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진이 뉴멕시코 사막에서 플루토늄 내폭형 핵장치 Gadget을 폭발시켜 세계 최초의 핵폭발 시험에 성공함. 실험은 1945년 7월 16일 새벽 실시되었으며 로스앨러모스가 개발한 내폭 시스템의 실제 작동 가능성을 입증함. 이후 같은 기본 방식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Fat Man에 사용됨.
포츠담 정상회담 개막
트루먼·처칠·스탈린이 독일 포츠담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정상회담을 시작한 일. 유럽의 국경과 독일 점령 문제가 주요 의제였지만, 회담 기간에 일본에 대한 항복 요구문도 마련된 배경. 미국·영국·소련의 회담 참가국 구성과 미국·영국·중국의 포츠담 선언 발표국 구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 회의.
『독립신문』 충칭판, 제7호 발행
『독립신문』 충칭판이 1945년 7월 20일 제7호 발행.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비정기적으로 간행된 중국어 판본의 마지막 확인 호수로, 임시정부의 대외 활동과 한국광복군 관련 소식, 국제 정세 및 항일전선 관련 기사를 수록.
처칠, 대일 공동선언 문안에 동의
처칠 영국 총리가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내 대일 선언의 현 문안에 영국 정부를 대표해 서명할 뜻을 밝히고 조속한 발표를 요청한 일. 경제활동을 다룬 제11항의 문구 수정을 제안한 기록. 이튿날 장제스의 전문 동의와 함께 미국·영국·중국 세 정부 명의의 발표로 이어진 협의.
미국·영국·중국이 일본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면서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요구한 사건. 일본의 주권을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와 연합국이 정할 작은 섬들로 제한한다는 제8항의 명시. 점령과 비군사화, 전쟁범죄 처벌 및 평화적 경제활동의 원칙이 함께 제시되면서 이후 항복과 강화조약의 기준 마련.
스즈키 총리의 선언 묵살 발언
스즈키 간타로 일본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포츠담 선언을 카이로 선언의 반복으로 낮게 평가하고, 묵살하며 전쟁을 계속한다는 취지로 발언한 일. 미국이 감청한 일본 방송의 번역문에 남은 기록. ‘묵살’이라는 단어의 의도와 번역에는 논쟁이 있지만, 이를 단순한 번역 실수 하나가 원자폭탄 투하를 초래했다는 인과관계로 단정할 수는 없음.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영국 애틀리 총리, 소련 스탈린이 참가한 포츠담 회담이 1945년 8월 2일 종료됨. 연합국 지도자들은 독일의 비군사화·비나치화와 점령 관리, 배상 문제, 외무장관회의 창설 등 전후 질서에 관한 주요 합의 내용을 발표함. 동아시아에서는 회담 중 발표된 포츠담 선언이 일본에 항복을 요구해 한반도의 식민지 지배 종식 및 전후 처리와 연결되었음. 포츠담 선언일(7월 26일)과 회담 종료일(8월 2일)은 구분됨.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우라늄 건배럴 방식의 원자폭탄 Little Boy를 투하함. 오펜하이머가 이끈 로스앨러모스는 사용된 핵무기의 설계·개발을 담당했지만 실제 투하의 군사적 명령권자는 아니었음. 히로시마시는 정확한 사망자 수를 확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하며 1945년 말까지 약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함. 피해자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대만 출신자와 중국인, 외국인 포로 등도 포함됨.
1945년 8월 7일 중국 시안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한국광복군 지도부가 미국 전략사무국(OSS) 국장 윌리엄 도노반 등과 회담해 독수리작전에 따른 국내 진입과 항일 비밀공작 협력을 논의함. 한국광복군 제2지대는 미군과 합동 첩보·통신 훈련을 수행했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예정했던 국내 침투 작전은 실행되지 못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국 정보기관의 전시 협력을 보여주는 주요 사건이며, 이것이 곧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공식 승인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음.
몰로토프 소련 외무인민위원이 모스크바의 일본 대사에게 대일 선전포고 성명을 전달하며 7월 26일 연합국 선언에 참여한다고 밝힌 일. 성명에서 다음 날인 8월 9일부터 일본과 전쟁 상태에 들어간다고 통고. 일본이 소련을 통해 평화를 중재받으려던 구상을 무너뜨리고 포츠담 선언을 지지하는 나라가 네 나라로 확대된 전환점.
미군이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서 플루토늄 내폭형 원자폭탄 Fat Man을 폭발시킴. 트리니티 시험에서 검증한 것과 같은 기본적인 내폭 방식의 무기였으며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개발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함. 나가사키의 공식 추모기관 자료는 1945년 말까지 약 7만~7만4천 명이 사망하고 약 7만5천 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산함. 중국인·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외국인 전쟁포로도 피해자에 포함됨.
일본 정부가 천황의 국가 통치권을 해치는 요구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해석 아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뜻을 밝힌 일. 8월 10일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하여 미국·영국·소련·중국에 전달한 외교 통보. 모든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 최종 수락과는 구별되며, 천황의 지위에 대한 연합국의 답신을 기다리던 단계.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가 미국·영국·소련·중국을 대표하여 일본의 8월 10일 통보에 답신한 일. 항복 순간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통치권이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종속되며, 최종 통치 형태는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로 정해진다는 내용. 천황 통치권의 무조건 보장을 요구한 일본 측 해석을 그대로 승인한 답신은 아님.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현지 시각 8월 14일 오후 7시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회신을 포츠담 선언의 완전한 수락으로 판단한다고 발표한 일. 맥아더를 항복 접수의 연합국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연합군에 공격 중지를 명령했음을 알린 발표. 정식 항복문서 서명은 이후 절차라는 점을 함께 밝힌 기록.
일본 정부가 포츠담 선언의 조항을 수락한다는 조서의 공포 사실과 이행 의사를 네 연합국에 통보한 일. 천황이 정부와 대본영에 필요한 항복 조건의 서명 권한을 부여하고, 군대에 전투 중지와 무기 인도 등을 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내용. 앞선 10일의 조건부 수락 제안과 11일 연합국 회답을 거친 최종 결정.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전날 녹음한 종전 조서가 일본 시각 8월 15일 정오 라디오로 방송된 일. 일본 국민에게 포츠담 선언 수락과 전쟁 종결 결정을 알린 방송으로, 이른바 옥음방송. 정부의 14일 수락 결정과 9월 2일 항복문서 서명 사이에 이루어진 대국민 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