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가 8월 13일 기각되었으나 이틀 뒤 광복을 맞아 8월 17일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4명이 풀려남. 석방된 회원들은 곧바로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되살림. 중단되었던 우리말 사전 편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
히로시마·나가사키 폭격 직후 오펜하이머가 대표로 서명한 임시위원회 과학패널이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서한을 제출함. 더 강력한 핵무기가 개발될 가능성이 높고 효과적인 군사적 방어책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며, 핵무기 우위만으로 미국의 장기적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전쟁 자체를 방지하기 위한 국제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함.
조선인 귀환자들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일본 마이즈루만에서 폭발해 침몰한 사건. 해방 직후 귀향길에서 발생한 대규모 인명 피해로, 탑승 인원과 희생자 규모 및 침몰 경위를 둘러싼 조사와 진상규명 요구가 이어진 참사.
경남도청의 한국인 관리들이 귀환조선인원호본부를 구성하고 민간 유지들이 조선귀환동포구호회를 조직한 날. 부산으로 들어오는 귀환동포의 구호를 관과 민간이 함께 떠맡기 시작한 움직임.
서울 수송동 중동학교 강당에서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창립총회를 개최한 날. 해외에서 귀환을 기다리거나 곤경에 처한 동포를 돕기 위해 기부금과 물자를 모으기로 한 민간 구호활동. 당시 매일신보의 보도일은 9월 2일.
일본 정부와 군 대표가 도쿄만의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공식 수락한 사건. 일본군의 적대행위 중지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권한을 받아들인 전쟁 종결의 군사적·정치적 전환점. 이후 점령을 끝내고 국가 간 법적 전쟁상태와 전후 권리관계를 정리하는 강화조약 협상의 출발점.
오타와 주재 소련대사관 암호 담당자 이고르 구젠코가 소련의 대캐나다·대미 첩보 활동을 보여주는 100여 건의 비밀문서를 가지고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그는 언론사와 캐나다 당국에 자료를 전달하려 했고, 이후 보호를 받으며 망명했다. 이 사건은 캐나다 내 소련 첩보망을 드러내고 전후 냉전의 시작을 상징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미국이 맥아더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일본 점령 권한에 관한 지침을 전달한 일. 일본 정부를 통하여 통치하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최고 권한을 부여하고, 포츠담 선언을 일본과의 계약 관계로 해석해 점령 권한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미국 측 입장을 명시. 선언 수락이 실제 점령 통치의 원칙으로 구체화되는 과정.
조선어학회 사건의 재판 증빙 자료로 경성고등법원에 보내졌던 사전 원고가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화물 창고에서 발견됨. 10여 년에 걸친 어휘 수집과 집필의 결실이 사라질 뻔하다 극적으로 돌아온 것. 이 원고를 바탕으로 『큰사전』 간행이 재개되었으며, 원고는 뒷날 국가지정기록물 제4호로 지정됨.
해방 뒤 38선을 경계로 남북의 철도 운영이 갈리면서 경의선의 남북 관통운행이 단절됨. 개성역은 남측 운행 구간의 북쪽 종착역이 되었고, 서울~개성 구간의 열차 운행은 계속되었음.
따라서 이날을 경의선의 모든 열차가 멈춘 날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음. 이후 한국전쟁과 정전 체제 속에서 단절 지점과 운행 범위가 다시 달라졌으며, 전쟁 이후 남측 경의선은 문산을 중심으로 끊어진 노선으로 남게 되었음.
미군정, 매일신보사를 접수
광복 직후 사원자치위원회가 매일신보 발행을 이어가던 가운데, 1945년 10월 2일 미군정청이 매일신보사를 접수함. 이후 오세창 등 새 간부진을 중심으로 신문사가 재편되고,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되는 방향으로 정리됨.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해방 직후 새 언론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
김성수, 미군정 군정장관 한국인 고문에 임명
미군정이 김성수를 포함한 한국인 11명을 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함. 광복 이후 정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초기 단계가 됨.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시작됨. 대회는 10월 13일까지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조직됨. 북한은 10월 10일을 조선로동당 창건일로 기념하지만, 현 조선로동당은 이후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의 통합을 거쳐 1949년에 성립한 조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음.
해방 직후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이 일반 대중 앞에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해 연설함. 소련군이 점령한 북부 지역에서 항일 활동 경력을 내세운 김일성을 주민에게 소개한 대규모 정치 집회의 성격을 가짐.
이 행사는 해방 이후 북부 지역 정치 지도부가 재편되는 과정과 김일성이 정치적 지도자로 부상하는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사건. 당시 발표된 연설 요지는 이튿날 《평양민보》에 소개됨.
이승만, 33년 만에 귀국
이승만이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음.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개인 자격의 귀국임을 밝히고 자주독립과 단결을 호소했음.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음. 1912년 미국으로 떠난 뒤 33년 만의 귀국이었음. 일본의 패전과 해방으로 독립운동의 과제가 국내에서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던 시기에, 오랫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정치지도자가 국내 정치무대로 들어온 것임.
이튿날인 10월 17일, 이승만은 미군정청에서 존 하지 중장과 아널드 소장의 소개로 기자회견을 했음. 그는 자신이 임시정부 대표나 외교기관 책임자의 지위로 온 것이 아니라 평민의 자격으로 돌아왔다고 밝힘. 국내 사정은 차차 알아가겠다고 말하면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동포들의 협력과 단결을 강조했음.
이 기자회견은 귀국과 동시에 이승만이 어떤 자격과 명분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했는지 보여주는 자료임. 장기간의 해외활동에서 국내의 자주독립국가 수립 운동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전환점이 됨.
오펜하이머가 전시 임무가 끝난 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남.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무기 개발 과학책임자 시기를 마무리하고 이후 대학과 정부의 원자력 정책 자문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김.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으로 발령
미군정이 조병옥을 경찰조직의 최고 책임자인 경무부장으로 발령함. 조병옥은 10월 26일 기자회견에서 경찰행정을 새롭게 하고 일제식 압박·위협 경찰을 청산하겠다는 방침을 밝힘.
국제연합 헌장이 중국·프랑스·소련·영국·미국 등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다른 서명국 과반의 비준을 거쳐 발효. 국제연합이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 국가 간 협력, 인권 존중을 목적으로 하는 상설 국제기구로 공식 출범.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던 폴란드가 이후 헌장에 서명하면서 창설 회원국은 51개국으로 구성. 10월 24일은 이후 ‘유엔의 날’로 지정.
미군정청 외무과장 엔더스 소좌의 발표에 따른 1945년 10월 28일까지의 일본발 조선인 귀환자 누계 17만 6,015명. 당일 귀환자는 1만 2,553명이며, 같은 발표에 포함된 일본인 철수 인원은 군인 11만 55명과 일반인 9만 205명. 전체 해외 귀환자의 최종 합계가 아닌 시점별·경로별 행정 집계. 통계 기준일인 10월 28일과 《매일신보》 보도일인 11월 1일의 구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1945년 11월 23일 김구·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 제1진으로 김포비행장에 도착.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함. 김규식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지 약 32년 만에 귀국해 국내 정치 활동과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나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