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50–1959년의 기록 725건

구간을 선택해 더 좁은 기간으로 좁혀 보세요.

가장 많은 기록
1950 · 110건
관련 엔티티
384개
날짜가 확정된 기록
73%
구간을 선택해 기록 보기 1950 · 110건

6년제 진명여자중학교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누고 각 과정의 수업연한을 3년으로 조정. 개편 시기는 총동창회의 『진명 100년 인물 100년』에 1950년 6월 1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1951년으로 기록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져 있던 광화문이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피해를 입어 상부 목조 문루가 불타고 석축만 남음.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의 훼손에 이어 전쟁으로 다시 궁문의 모습을 잃은 사건. 남은 석축과 과거 도면·사진은 이후 복원의 바탕이 됨.

미국 정부가 국제무역기구 설립을 위한 아바나 헌장을 의회에 다시 제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해. 미국의 참여 전망이 사라지면서 상설 국제무역기구 구상이 실현되지 못한 전환점.

그 결과 임시 협정이던 GATT와 체약국 회의·사무국이 무역협상과 규칙 운영을 이어 맡게 된 경위. 여기서 체약국은 협정에 참여해 권리와 의무를 받아들인 국가를 뜻하며, 정식 국제기구인 훗날의 WTO 회원국이라는 표현과 구분.

1948년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유니세프가 한국 정부와 기본협정을 체결함. 한국전쟁을 거치며 분유와 담요 등 아동을 위한 구호물자를 공급했고, 이후에도 보건·영양 지원을 이어감. 공식 협력 연혁은 1950~1993년 한국에 제공된 지원을 2,390만 달러 이상으로 집계함.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유리한 종결을 기다리지 않고 대일 강화 작업을 계속하는 방침을 승인한 사건. 존 포스터 덜레스가 대통령의 특별대표 자격으로 협상을 이끌도록 하는 조치와 결합. 한국전쟁의 전황과 강화 추진을 분리하면서 일본의 주권 회복과 미국 중심 안보 질서 편입을 앞당기는 전환점.

산레모의 카지노에서 첫 음악제가 시작됨. 닐라 피치와 아킬레 톨리아니, 파사노 듀오가 20곡을 나누어 불렀으며,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에게 전달되었음. 오늘날처럼 많은 가수가 각자의 신곡을 들고 출전하는 대형 텔레비전 행사가 아니라, 소수의 가창자가 여러 작품을 소개하는 경연으로 출발했음. 닐라 피치의 ‘Grazie dei fiori’가 첫 우승곡이 되었음.

산레모 음악제

흥남에서 상륙함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던 박일환 가족이 사회부와 부산시의 지시에 따라 다시 거제도로 이동한 사례. 장승포의 마전동 임시수용소를 거쳐 연초면 연사리 피난민촌에서 1952년 5월까지 이어진 피난 생활. 서울기록원이 유엔 사진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한 가족의 이동 경로. 흥남에서의 탈출이 곧 정착을 뜻하지 않았으며 주거와 생계를 찾아 여러 곳을 옮겨야 했던 피난민의 장기 피난 경험.

국군이 거창군 신원면의 어린이·노인·여성 등을 포함한 주민 수백 명을 집단살해함. 이승만 정부는 현장조사를 방해하고 학살을 군법회의에 따른 적법한 처형으로 설명하는 허위 발표를 내놓았음.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민간인들을 집단살해함. 후방의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모아 총살했으며, 어린이·노인·여성도 희생됨.

신중목 의원이 3월 29일 국회에서 사건을 폭로하자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음. 그러나 신성모 국방장관과 군 관계자들은 현장을 은폐하고 국군을 공비로 위장시켜 총격을 가하게 하는 방법으로 조사를 방해했음. 4월 24일 공보처는 어린이·노인·여성 등을 제외한 남자 187명을 군법회의에서 유죄로 판단하여 개별 처형했다는 허위 공식설명을 발표함. 이는 무고한 민간인의 집단살해를 합법적인 사형집행으로 꾸민 은폐였음.

이승만은 4월 30일 대통령 지시문에서 군인의 다수 생명 희생과 사건의 해외 파장을 인식하면서 관련 지휘관들을 징벌하도록 했음. 그러나 적법한 처형이었다고 하더라도 정부 체통을 위해 처벌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논란을 초래한 데 대해 다소간 벌을 주라고 지시함. 공보처의 허위발표와 군 관계자들의 조사방해는 확인되지만, 이승만이 구체적인 위장공비 작전이나 허위 증거 작성을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까지 확인된 것은 아님.

1951년 12월 16일 군법회의는 관련 지휘관의 위법한 명령과 살해 책임을 인정하여 유죄판결을 내렸음. 당초 정부가 설명한 적법한 처형이 아니라 위법한 명령과 집단살해였음이 같은 해 재판에서도 드러났음.

한국전쟁으로 서울에서 정상적인 대학 운영이 어려워지자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의 연합강의 방식으로 수업을 이어감. 전쟁 중 교육이 끊기지 않도록 여러 대학의 인력과 시설을 공동으로 활용한 운영 방식.

서울대는 피난지에 단과대학별 임시 교사를 마련했으며, 1952년 전시연합대학 체제가 해체된 뒤에도 부산에서 독자적으로 강의를 계속함.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가 정부 부채 관리와 통화정책 운용을 둘러싼 갈등 끝에 재무부–연방준비제도 협정(Treasury–Federal Reserve Accord)을 발표함.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이어진 국채금리 억제 정책에서 벗어나 연준이 경제 상황에 따라 통화정책을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을 강화함. 정부 부채 관리와 통화정책을 분리하고 현대 연준의 독립성을 형성한 주요 전환점.

미국이 전쟁상태 종결과 일본의 주권 회복을 중심으로 한 잠정 조약안을 영국에 제시한 단계.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리 포기는 담았으나 한국의 개별 섬 이름은 열거하지 않은 문안. 다른 관계국에도 의견을 요청하면서 미국안과 영국안의 차이를 조정하는 본격 협상의 기초 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