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 일제강점기 초기 근대문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후 친일 협력으로 변절한 인물.
이광수 (춘원)
소설가·언론인으로 필명은 춘원(春園). 1917년 『무정』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근대 문학의 개척자로 자리매김한 인물.
초기에 도쿄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을 이끄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1920년대 이후 「민족개조론」·「민족적 경륜」 등을 통해 실력양성·자치론으로 기울었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겪은 뒤 창씨개명과 학병 권유 등 노골적 친일 행위로 전향한 인물.
한국 근대 문학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으나 동시에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로도 규정되는 이중적 평가의 대상이며,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그해 병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추가 정보
문학적 개척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일본 유학 중 문필 활동을 시작함.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 『무정』을 연재하며 언문일치체와 근대적 서사·인물 심리 묘사를 본격 도입해 한국 근대소설의 출발점을 놓음. 이후 『개척자』·『흙』·『유정』·『사랑』 등 다수의 장편과 논설을 발표하며 당대 최대의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문인으로 활동함.
독립운동과 언론 활동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주필을 맡음. 흥사단 이념에 공명해 국내에서 수양동맹회·수양동우회를 이끌었고, 1926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등 언론계 요직을 거침.
친일 전향과 말년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이후 태도가 급변해, 1940년 「창씨와 나」를 통해 창씨개명(향산광랑)을 옹호하고 학병 지원과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등 노골적 친일 행위를 이어감.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그해 10월 사망한 것으로 전해짐.
타임라인
23이광수가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함. 작품은 6월 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게재되고, 1918년 단행본으로 간행됨. 언문일치에 가까운 문체와 근대적 서사, 인물 심리 묘사가 포함된 한국 근대문학사상 최초의 장편소설.
재일 조선인 유학생 실행위원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작성에 착수. 백관수·김도연·이광수가 기초위원으로 선출되고, 실제 선언서 문안은 이광수가 전담한 것으로 알려짐. 완성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한국어·일본어·영어로 마련하며 도쿄에서 독립을 선포하기 위한 조직과 문건을 갖춘 단계.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 집회에는 약 600명이 참석했으며, 선언식 뒤 약 400명이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와 강제 해산으로 주동자들이 검거됨. 선언서와 관련 문건은 같은 날 일본 정부와 의회, 각국 외교 공관과 언론사 등에 발송되었으며, 국내 독립운동 세력에 자극을 주어 3·1운동 준비를 촉진한 선도적 사건으로 평가.
이광수가 1월 31일 고베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가 영문 2·8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클레망소·로이드 조지 등에게 전문으로 보냄. 또한 상하이 영자신문에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보도하도록 요청하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한 활동.
『독립』, 상하이에서 창간
1919년 8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동익리에서 창간. 이광수가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주요한·이영렬 등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함. 상하이 망명 지사들이 국내외 소식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싣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발전시킨 매체로, 민족사상 고취와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외 전파를 발간 목표로 제시함.
이광수가 상하이에서 안창호가 창설한 흥사단에 입단함. 흥사단이 내세운 무실역행과 인격 수양·민족 역량 양성의 노선에 참여했으며, 귀국 후에는 흥사단의 국내 조직인 수양동맹회 발기와 수양동우회 통합 과정에 관여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료편찬위원회와 『독립신문』에서 활동하던 이광수가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국내로 귀국함. 귀국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나 곧 불기소 처분.
안창호로부터 흥사단의 국내 조직을 결성할 사명을 받고 귀국한 이광수가 김종덕·박현환·김윤경·강창기 등과 함께 서울에서 수양동맹회를 결성함. 청년 남녀의 인격 수양과 민족의 실력 배양을 표방한 국내 흥사단 계열 조직으로, 1926년 평양의 동우구락부와 합동해 수양동우회로 발전.
이광수가 『개벽』 1922년 5월호에 장편 논설 「민족개조론」을 발표함. 조선 민족의 쇠퇴 원인을 구성원들의 도덕과 성격에서 찾고, 인격 수양·교육·경제적 자립·사회봉사를 통한 전면적 개조를 주장함. 독립보다 민족성 개조와 실력양성을 앞세운 논리로 지식인과 청년층의 강한 비판을 불러온 논설.
이광수가 장백산인이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허생전》 연재를 시작함. 박지원의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허생의 상업 활동과 이상 공동체 건설, 사회 개혁 구상을 대화와 사건 중심의 장편 서사로 확장한 고전 개작.
이광수가 『동아일보』 1면에 「민족적 경륜」을 5회에 걸쳐 연재함. 정치·산업·교육 분야의 결사를 조직하고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민족의 당면한 권리와 이익을 확보하자고 주장함.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타협적 자치론이라는 비판과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불러왔으며, 이광수가 동아일보사를 떠나는 계기가 된 논설.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통합해 수양동우회를 결성하고 이광수도 발족에 참여함. 두 단체 모두 안창호가 창설한 흥사단의 국내 조직 성격을 지닌 단체로, 인격 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통한 실력양성을 표방함. 이후 기관지 『동광』을 발행하며 교육·계몽 활동을 전개한 조직의 출범.
1924년 「민족적 경륜」을 둘러싼 논란으로 동아일보사를 떠났던 이광수가 1926년 11월 8일 편집국장으로 취임함. 이후 편집 책임자로 근무하는 한편 「마의태자」·「단종애사」·「이순신」·「흙」 등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
참고로 1923년 5월 16일 ‘촉탁기자’로 발령받아 12월 1일자로 ‘임(任) 기자’가 됐고 1926년과 29년 두 차례에 걸쳐 4년 6개월 여를 편집국장으로 재임.
이광수가 1933년 8월 조선일보사 부사장에 취임함. 1934년 5월까지 재직하며 신문사 운영과 언론 활동에 참여.
일제가 수양동우회 관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하면서 이광수도 1937년 6월 7일 체포·수감됨. 검거는 이후 서울 본부와 평양·선천·안악 등 각지의 회원으로 확대돼 모두 181명이 붙잡힘. 수양동우회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고 이광수의 장기적인 수사와 재판이 시작된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병보석 상태에 있던 이광수가 예심 과정에서 전향을 선언함. 주요한과 함께 전향 의사를 밝히고 조선신궁을 참배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전향자 중심의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함.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경력에서 이탈해 일제의 황민화·전쟁 협력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전환점.
경성 부민관에서 문인 약 250명이 참여한 조선문인협회 창립식이 열리고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광수가 회장에 선출됨. 이광수는 취임사에서 국민문학 건설과 내선일체 구현을 협회의 목적으로 제시함. 이후 전선의 일본군을 위한 위문문 모집과 문예 행사 등 문단 차원의 전쟁 협력을 이끈 친일 문인단체의 출범.
이광수가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에 「창씨와 나」를 게재함.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함. 황민화운동과 내선일체를 선전한 이광수의 친일 행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대표적 사례.
이광수가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도지원병 지원을 권유하는 활동을 전개함. 도쿄 메이지대학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 등에 참석하고 일본 각지의 유학생을 상대로 전쟁 참여를 독려함. 조선 청년을 일본군에 동원하려 한 이광수의 전시 친일 협력을 대표하는 활동.
이광수가 창씨개명 옹호와 지원병·학병 권유 등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 혐의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됨. 1949년 3월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 같은 해 8월 불기소 처분.
한국전쟁 발발 뒤 서울에 머물던 이광수가 1950년 7월 북한군에 의해 납북됨. 당시 폐결핵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으나 북으로 강제 연행.
한국전쟁 중 납북된 소설가이자 언론인 이광수가 1950년 10월 25일 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짐. 정확한 사망 장소와 경위는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으나, 장기간 앓던 폐결핵과 납북 이후의 수감·이송 과정에서 건강이 크게 악화된 것으로 알려짐.
그 외 사실들
기록
이광수는 필명 춘원(春園)으로 활동한 소설가로, 1917년 『무정』을 발표해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작가로 평가됨.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광수는 창씨개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꾸고 1940년 「창씨와 나」에서 이를 옹호함.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논란
이광수는 학병 권유·창씨개명 옹호 등 친일 행적으로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됨.
출처: 민족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