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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로 음악을 시작한 조용필이 자신을 보컬로 세워 결성한 밴드. 미국 시카고의 브라스 밴드의 영향을 받아 옛 음악 친구들을 모아 만든 7인조 브라스 밴드 (트럼펫 둘, 트롬본 하나, 기타, 베이스, 건반, 드럼)를 만들어 서울고고 클럽에서 연주를 함. 이후 '위대한 탄생'으로 개칭되어 그의 음반·방송·콘서트 전반을 함께한 전속 밴드의 출발점이 됨.

조용필(기타 및 보컬)은 전설적인 드러머 김대환을 주축으로 기타리스트 최이철과 함께 3인조 록 밴드 김트리오를 결성. 당시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가수왕을 차지하며 조용필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됨.

2009년 11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이명세가 포함됨. 앞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종교 부문에도 수록된 바 있음. 그의 친일 행적이 국가 차원에서 공식 규명·기록된 결과.

이명세 (1893년)

1957년 7월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이른바 '재단파'가 성균관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유도회와 성균관대에서 폭력으로 몰아낸 뒤, 이명세가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 자리에 오름(총장은 이선근). 일제에 협력한 친일 유림이 해방 뒤에도 단죄되기는커녕 독재정권의 비호 아래 유림계 실권을 장악한 대표적 사례로 비판됨.

1942년 일제의 조선 징병제 시행을 찬양하는 한시와 글을 발표하고 각지를 돌며 강연 활동을 벌임. 조선 청년의 전쟁 동원을 유교적 명분으로 정당화한 적극적 친일 행각.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포함의 핵심 근거가 된 행위.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결성된 관변 유림 단체 조선유도연합회의 상임참사로 선출됨. 전시체제 아래 유림을 황국신민으로 동원하기 위한 단체의 핵심 임원진에 합류함. 그가 친일 유림으로 본격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

이명세 (1893년)

호서은행이 한일은행에 합병된 뒤 1932년 9월 동일은행(東一銀行) 검사역으로 임명됨. 이어 주식회사 남창사·철원창고·이문당 이사와 동문사 이사 겸 사장(1940), 재단법인 학린사 상임이사 등 여러 기업·법인의 임원을 두루 맡으며 금융·실업계 인사로 활동함. 법조 서기에서 출발해 은행원을 거쳐 기업가로 자리잡은 그의 경력이 정점에 이른 시기.

1911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1918년 무렵 경성전수학교(뒷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함. 같은 해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서기로 임용된 뒤 공주지방법원 서산지청·홍성지청 서기로 옮겨 1920년대 초까지 법조 실무에 종사함. 근대 학교 교육을 받은 뒤 사법 실무로 사회에 진출한 출발점.

1986년 지구레코드와 계약하며 〈창밖의 여자〉·〈단발머리〉·〈못찾겠다 꾀꼬리〉 등 31곡의 저작권 일부를 양도하는 조항이 끼워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분쟁으로 번짐. 조용필은 저작권 반환을 요구하며 소송을 벌였으나 2004년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함. 창작자 권리 인식이 부족하던 시절의 대표적 저작권 분쟁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