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로 음악을 시작한 조용필이 자신을 보컬로 세워 결성한 밴드. 미국 시카고의 브라스 밴드의 영향을 받아 옛 음악 친구들을 모아 만든 7인조 브라스 밴드 (트럼펫 둘, 트롬본 하나, 기타, 베이스, 건반, 드럼)를 만들어 서울고고 클럽에서 연주를 함. 이후 '위대한 탄생'으로 개칭되어 그의 음반·방송·콘서트 전반을 함께한 전속 밴드의 출발점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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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기타 및 보컬)은 전설적인 드러머 김대환을 주축으로 기타리스트 최이철과 함께 3인조 록 밴드 김트리오를 결성. 당시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가수왕을 차지하며 조용필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됨.
해체 직전의 록 그룹 화이브 휭거스에 리드 기타(퍼스트 기타)로 합류. 파주군 장파리 DMZ 클럽을 주 무대로 활동. 이 시기의 경험이 뮤지션으로 중요한 밑거름이 됨.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동네 친구 3명과 함께 4인조 컨트리 록그룹 애트킨스(Atkins)를 결성해 주한 미8군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함. 이후 파이브 핑거스·김 트리오 등을 거치며 록 음악에 몰두함. 훗날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는 출발점.
한양대 작곡과에 재학하던 유재하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합류함. 이후 김현식·봄여름가을겨울을 거쳐 1987년 유일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남기고 요절함.
2009년 11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이명세가 포함됨. 앞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종교 부문에도 수록된 바 있음. 그의 친일 행적이 국가 차원에서 공식 규명·기록된 결과.
1957년 7월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이른바 '재단파'가 성균관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유도회와 성균관대에서 폭력으로 몰아낸 뒤, 이명세가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 자리에 오름(총장은 이선근). 일제에 협력한 친일 유림이 해방 뒤에도 단죄되기는커녕 독재정권의 비호 아래 유림계 실권을 장악한 대표적 사례로 비판됨.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유교 교화기관인 경학원의 사성(司成)으로 임명됨. 사성은 경학원에서 강학·교화를 맡은 직책으로, 유교적 언어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함. 일제 말기까지 그의 친일 행적이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리.
1942년 일제의 조선 징병제 시행을 찬양하는 한시와 글을 발표하고 각지를 돌며 강연 활동을 벌임. 조선 청년의 전쟁 동원을 유교적 명분으로 정당화한 적극적 친일 행각.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포함의 핵심 근거가 된 행위.
1941년 10월 태평양전쟁 지원을 위해 결성된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림. 학병·징병 독려와 전시 동원을 표방한 단체의 창립에 가담함. 유림 활동을 넘어 전쟁 협력 단체로까지 친일 행적이 확대된 사례.
1941년 6월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로 선출되며 단체 내 위상이 한층 높아짐. 황도유학 진흥과 전쟁 협력 선전을 이끄는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함. 유림 친일화의 중심에서 역할을 키워 간 단계.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결성된 관변 유림 단체 조선유도연합회의 상임참사로 선출됨. 전시체제 아래 유림을 황국신민으로 동원하기 위한 단체의 핵심 임원진에 합류함. 그가 친일 유림으로 본격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
호서은행이 한일은행에 합병된 뒤 1932년 9월 동일은행(東一銀行) 검사역으로 임명됨. 이어 주식회사 남창사·철원창고·이문당 이사와 동문사 이사 겸 사장(1940), 재단법인 학린사 상임이사 등 여러 기업·법인의 임원을 두루 맡으며 금융·실업계 인사로 활동함. 법조 서기에서 출발해 은행원을 거쳐 기업가로 자리잡은 그의 경력이 정점에 이른 시기.
1923년 10월 충청 지역 민간은행인 호서은행 대리로 임명되면서 금융인의 길에 들어섬. 이후 서무과장(19241927)과 홍성지점장(19271930)을 지내며 은행 경영 실무에 깊이 관여함. 법조 서기에서 금융인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전환점.
1911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1918년 무렵 경성전수학교(뒷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함. 같은 해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서기로 임용된 뒤 공주지방법원 서산지청·홍성지청 서기로 옮겨 1920년대 초까지 법조 실무에 종사함. 근대 학교 교육을 받은 뒤 사법 실무로 사회에 진출한 출발점.
가수 활동 50주년을 맞아 2018년 대규모 기념 콘서트를 잇따라 개최함. 반세기에 걸쳐 정상을 지켜 온 보기 드문 음악 인생을 기념한 무대. 세대를 아우르는 팬들이 함께한 자리.
대마초 파동 해금 직후인 1979년 자신의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을 결성함. 이 밴드와 함께 곡을 편곡하고 앨범을 프로듀싱하면서 한국 가요계에 싱어송라이터 개념을 확립함. 이듬해 정규 1집을 내며 본격적인 전성기로 진입하는 토대.
한국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13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음. 앞서 2003년 보관문화훈장에 이은 두 번째 문화훈장 서훈. 대중가수로서 국가가 인정한 위상을 보여 줌.
1986년 지구레코드와 계약하며 〈창밖의 여자〉·〈단발머리〉·〈못찾겠다 꾀꼬리〉 등 31곡의 저작권 일부를 양도하는 조항이 끼워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분쟁으로 번짐. 조용필은 저작권 반환을 요구하며 소송을 벌였으나 2004년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함. 창작자 권리 인식이 부족하던 시절의 대표적 저작권 분쟁 사례.
2005년 북한 평양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어 남측 가수로는 보기 드문 대규모 공연을 성사시킴. 남북 문화 교류가 제한적이던 상황에서 이뤄진 의미 있는 무대. 그의 음악이 분단을 넘어 호응을 얻은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