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부지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매장·박물관·카페를 갖춘 방문자 센터 '덴비 포터리 빌리지(Denby Pottery Village)'를 개관함. 글로스터 공작(HRH Duke of Gloucester)이 개관을 맡았고, 도자 제조 현장을 관광·체험 공간으로 연 시도. 이후 덴비를 더비셔의 대표 명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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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회사 컬러롤이 법정관리(receivership)에 들어가자, 덴비 경영진이 세 투자자의 지원을 받아 회사를 인수(MBO)함. 모기업의 붕괴 속에서 독립을 되찾은 전환점으로, 같은 해 미국 독점 유통사도 새로 정해 수출 기반을 다짐.
홈퍼니싱 그룹 컬러롤(Coloroll)이 크라운 하우스로부터 덴비를 사들임.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컬러롤 산하에서 덴비는 다시 주인을 바꿈. 그러나 컬러롤 자체가 곧 경영난에 빠지며 덴비의 운명도 흔들리게 됨.
크라운 하우스 엔지니어링(Crown House Engineering)이 덴비의 주식을 사들여 인수함. 새 모회사 아래에서 덴비는 테이블웨어와 조리도구에 집중했으나, 1980년대는 맞지 않은 인수와 미국 시장 부진으로 부침이 컸던 시기. 이후 이어질 여러 차례 소유권 변동의 시작.
디자이너 길 펨버턴이 덴비의 상징적 미드센추리 식기 셰브런(Chevron)과 아라베스크(Arabesque)를 디자인함. 셰브런은 치즈 항아리를 장식하던 룰렛 무늬에서, 아라베스크는 러시아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붉은빛 손그림 장식에서 비롯됨. 두 라인 모두 1960~70년대 덴비의 황금기를 대표하며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 소장됨.
생산능력을 늘리기 위해 인근의 랭글리밀 포터리(Langley Mill Pottery)를 인수함. 전후 테이블웨어 수요 확대에 대응한 설비 확충으로, 1950~60년대 디자인 전성기를 뒷받침한 기반이 됨.
덴비가 장식용 화병·볼·담배 항아리 등에 '다네스비 웨어(Danesby Ware)' 상표를 붙여 선보임. 같은 시기 전통 솔트글레이즈 생산을 접고 다양한 색 유약 컬렉션으로 무게를 옮겨, 일렉트릭 블루 등 수집가들이 아끼는 라인을 내놓음. 실용 스톤웨어에서 색채를 입힌 아트·주방 도자기로 정체성을 넓힌 전환. 다네스비 웨어 명칭은 1924년경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쓰임.
1907년 단독 경영을 맡은 조셉 본 휠러(Joseph Bourne Wheeler)가 회사를 유한책임회사로 재편하고 대표이사가 됨. 1909년 창업 100주년을 기념한 데 이어 법인화로 가족 사업에서 근대적 기업 형태로 넘어감. 휠러는 1942년 사망할 때까지 회사를 이끎.
회사를 영국 굴지의 스톤웨어 제조사로 키운 조셉 본이 사망함. 1830년대 세계 수출을 이끌고 수십 년간 명성을 쌓은 그의 별세로, 아들 조셉 하비 본(Joseph Harvey Bourne)이 운영을 승계함. 창업 세대에서 2세대 경영으로 넘어간 분기점.
회사 이름이 '조셉 본 앤 선(Joseph Bourne & Son)'으로 바뀜. 창업주의 막내아들 조셉 본의 이름이 곧 회사를 대표하게 됐고, 가족 경영 체제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환점이 됨. 정확한 연도는 1841년경으로 추정됨.
관세청(Customs & Excise) 기록에 덴비가 영국에서 병과 항아리를 가장 많이 만드는 생산지로 등재됨. 유리가 흔치 않던 시절 스톤웨어 용기는 식품·약품 저장의 필수품이었고, 덴비는 그 수요의 정점에 선 제조사였음. 설립 20여 년 만에 전국 최대 규모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기록.
윌리엄 본이 점토층 자리에 도자기 공방을 세우고, 운영은 20대 초반의 막내아들 조셉에게 맡김. 회사는 조셉의 이름을 따 '조셉 본(Joseph Bourne)'으로 불렸고, 솔트글레이즈 스톤웨어 병·항아리를 만들며 빠르게 자리 잡음. 217년을 이어갈 덴비 포터리가 시작된 해.
벨퍼 포터리의 도공이던 윌리엄 본이 알프레턴–더비 간 유료도로 공사 중 드러난 대규모 점토층을 감정하도록 불려감. 더비셔는 점토와 석탄이 풍부해 당시 영국 도자 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본은 이 점토의 높은 품질을 단번에 알아봄. 이 발견이 이듬해 덴비 포터리 설립으로 이어진 출발점.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촛불집회가 번지자, 이에 맞서 탄핵에 반대하는 보수 진영이 태극기를 들고 집회를 열며 '태극기 집회'로 불림.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이후에도 이어짐. 국민 통합의 상징이던 태극기가 특정 정치 진영을 대표하는 표상으로도 쓰이게 된 현상으로, 국기의 상징성을 둘러싼 논쟁을 낳음.
2002년 한일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젊은 세대가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거나 얼굴에 그려 넣으며 응원 도구이자 패션으로 사용함. 엄숙한 숭배의 대상이던 국기를 친숙하고 즐거운 소지품으로 바꾼 변화로, 태극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달라진 분기점으로 꼽힘.
2009년 5월 서울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던 중 불단과 벽체 사이에서 1919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이 발견됨.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를 덧그린 형태로,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됨. 9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태극기는 2010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 2021년 보물로 승격됨.
2007년 1월 26일 법률 제8272호로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공포되고 6개월 뒤인 7월 27일부터 시행됨. 그동안 대통령령 수준의 규정으로 다뤄지던 국기의 제작·게양·관리·선양을 법률로 끌어올려 규정함. 태극기의 지위와 사용 원칙을 법으로 명문화한 현행 국기 제도의 토대.
1997년 10월 15일 태극의 빨강·파랑 등 태극기의 표준 색도가 개정되어 현행 색이 확정됨. 표준 색도에 가까운 팬톤 색으로 빨강 186C, 파랑 294C가 함께 제시됨. 그동안 모호하던 색 기준을 명확히 해 태극기 색을 통일하려는 조치.
1984년 2월 21일 대통령령 제11361호로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을 제정함. 그동안 '국기제작법'과 '국기게양방법에 관한 건'으로 나뉘어 있던 규정을 하나로 통합해 국기의 제작·게양·관리 기준을 체계적으로 정함. 2007년 국기법 시행 전까지 태극기 사용의 기본 규범으로 기능함.
정부가 1949년 1월 국기시정위원회를 꾸려 제각각이던 태극기 규격을 통일하는 작업에 착수, 여러 안을 검토한 끝에 '우리국기보양회' 안을 채택함.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 태극과 4괘의 위치·비율 등 현행과 같은 작도법을 확정함. 오늘날 태극기 표준 도안의 직접적인 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