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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태극기를 새 나라의 국기로 공식 제정함. 다만 이때까지도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라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함께 쓰임. 대한민국 정부의 국기로서 태극기의 법적 지위가 확립된 시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3월 16일 태극기에 조국 독립을 향한 결의를 붓글씨로 적고 서명해, 중국에서 활동하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샤를 메우스)에게 건넴.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를 거쳐 도산 안창호 가족에게 전해졌고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됨. 임시정부 지도자의 친필이 담긴 항일 유산으로,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 2021년 보물로 승격됨.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에서 전국의 시위 군중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침. 일제가 금지한 태극기를 거리에 내건 행위 자체가 독립 의지의 표현이었고, 이를 계기로 태극기는 광복 이전까지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굳어짐. 같은 해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태극기를 국기로 계승함.

조선의 외교고문 오언 N. 데니가 1890년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고종이 그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태극기. 가로 2.6m가 넘는 큰 기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자 초기 태극기의 형태를 보여주는 자료. 1981년 데니의 후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2021년 보물로 지정됨.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 고종이 왕명으로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조선의 정식 국기로 제정·공포함.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으니 팔도와 사도에 알려 사용하게 하자'고 아뢰자 윤허하여 전국에 반포됨. 태극기가 개인의 사용을 넘어 국가가 공인한 공식 국기로 자리 잡은 출발점.

제물포 조약 사후 처리를 위한 제3차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가던 1882년 9월, 증기선 메이지마루 선상에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직접 그려 사용함. 오랫동안 '최초의 태극기'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넉 달 앞선 이응준의 기를 변형해 4괘의 좌우를 바꿔 쓴 것으로 밝혀짐. 국가 사절이 외국에서 공식적으로 게양한 이른 사례로, 태극기가 대외적으로 조선을 대표하기 시작한 장면.

미국 측이 조약 체결에 쓸 국기를 요청하자, 김홍집의 지시를 받은 역관 이응준이 제물포에 정박한 미군함 안에서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를 그린 기를 제작·사용함.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 자리에서 쓰인 이 기는 오늘날 학계가 보는 '최초의 태극기'로, 조선이 근대 국가로서 처음 자국 국기를 내건 사례. 박영효의 기와 함께 태극기 기원 논의의 중심에 있음.

태극기

1923년 국기의 날 회의에서 68개 단체가 마련한 국기 예법(National Flag Code)이 1942년 공법 77-623호로 연방 법률이 됨. 국기의 게양·취급·경례 방식을 규정했으며, 나치 경례와 닮았다는 이유로 '벨러미 경례'를 빼고 가슴에 손을 얹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 변화임. 성조기에 대한 예우가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됨.

NFL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쿼터백 콜린 캐퍼닉이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에 항의하며 프리시즌 경기 전 국가 연주 때 기립을 거부하고 벤치에 앉음(이후 9월 1일부터 무릎 꿇기로 전환). '무릎 꿇기' 시위가 스포츠계 전반으로 번지며, 국기·국가에 대한 경의와 표현의 자유·인종 정의를 둘러싼 격렬한 사회 논쟁을 촉발함.

성조기

9·11 테러 당일 뉴욕 소방관 세 명이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잔해 위에 성조기를 세웠고, 사진기자 토머스 E. 프랭클린이 이 장면을 촬영함. 이오지마 사진에 비견된 이 이미지는 다음 날 신문 1면을 장식하며 미국의 회복과 단결을 상징하게 됨. 9·11 이후 성조기 판매가 급증하고 집·자동차에 국기를 다는 물결이 일며, 성조기가 국가적 애도와 결속의 표상으로 다시 부각됨.

성조기

텍사스 대 존슨 판결에 반발한 의회가 1989년 연방 국기보호법을 제정하자, 이를 어기고 국기를 불태운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이 다시 5대 4로 이 법을 위헌이라 결정함. 국기 소각을 처벌하려는 입법 시도가 거듭 좌절되면서, 성조기 모독을 금지하려면 헌법 수정밖에 없다는 점이 확인됨.

성조기

텍사스 대 존슨 판결로 주(州) 차원의 국기모독죄가 무효화되자, 의회가 '특정인을 모욕할 의도'라는 요건을 뺀 연방 차원의 국기보호법을 380대 38로 통과시킴. 부시 대통령은 헌법 수정이 옳은 길이라며 서명을 거부했으나 1989년 10월 28일 법률로 발효됨. 그러나 이 법 역시 이듬해 미국 대 아이크먼 판결에서 위헌으로 무효화되며, 성조기 모독 처벌을 둘러싼 입법·사법의 충돌을 보여줌.

성조기

1984년 공화당 전당대회(댈러스)에서 성조기를 불태운 그레고리 존슨의 유죄가 다투어진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이 5대 4로 '정치적 항의로서의 국기 소각은 수정헌법 1조가 보호하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판결함. 48개 주의 국기모독죄가 무효화되었고, 성조기가 곧 표현의 자유 논쟁의 한복판에 선 기념비적 판례.

성조기

하와이가 1959년 50번째 주가 된 데 따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행정명령 10834호가 정한 별 50개(6개씩 5줄·5개씩 4줄 엇갈림 배열) 성조기가 1960년 7월 4일부터 공식 국기로 시행됨. 알래스카 승격으로 1년간 쓰였던 49개 별 국기를 잇는 디자인으로, 60년 넘게 이어진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쓰인 성조기.

성조기

오하이오주 랭커스터 고교 2학년이던 17세 로버트 헤프트가 역사 수업 과제로, 알래스카·하와이의 주 승격을 내다보고 48개이던 별을 50개로 늘린 성조기를 직접 만들어 제출함. 교사는 '별 개수가 틀렸다'며 B−를 주었고, 이듬해 같은 배열이 공식 국기로 채택되자 학점을 A로 고쳐줌. 통설로 굳은 일화지만, 같은 도안을 낸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다는 점에서 단독 창안 여부엔 논란이 있음.

성조기

재향군인회 등이 500만 명 서명 청원을 모은 끝에, 상원이 1931년 3월 3일 법안을 통과시키고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이튿날 서명해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이 미국의 공식 국가가 됨. 포트 맥헨리의 성조기를 노래한 곡이 국가가 되면서, 국기와 국가가 하나의 애국 의례로 결합됨.

성조기

태평양전쟁 이오지마 전투 중 미 해병대원 6명이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을, AP통신 사진기자 조 로젠탈이 촬영함(두 번째 게양 장면). 이틀 뒤 신문에 실려 폭발적 반향을 일으켰고 그해 퓰리처상을 받음. 전쟁채권 모금과 해병대 기념비의 모델이 되며, 성조기가 미국의 희생과 승리를 응축한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로 각인됨.

성조기

그때까지 정부 기관에서만 66종의 제각각인 국기가 쓰이자,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이 행정명령 1556호로 별의 배열(가로 6줄×8개=48개)과 깃발의 비율·크기를 처음으로 표준화함(7월 4일 시행). 임의적이던 성조기의 형태가 통일된 규격을 갖추게 된 전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