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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렬

1924 3건
102년 전

이광수가 『동아일보』 1면에 「민족적 경륜」을 5회에 걸쳐 연재함. 정치·산업·교육 분야의 결사를 조직하고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민족의 당면한 권리와 이익을 확보하자고 주장함.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타협적 자치론이라는 비판과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불러왔으며, 이광수가 동아일보사를 떠나는 계기가 된 논설.

이광수 (춘원)

『독립신문』이 1924년 1월 1일 제169호부터 한자 제호 ‘獨立新聞’을 한글 ‘독립신문’으로 변경. 1919년 창간호부터 제21호까지 사용한 ‘獨立’, 제22호부터 제168호까지 사용한 ‘獨立新聞’에 이은 세 번째 제호. 김승학 운영 아래 한인 독자를 위한 국문 표기를 제호에 반영한 변경.

1923 17건
103년 전

청계천 암거공사 과정에서 광통교 북쪽 교대의 정릉 신장석 부분에 콘크리트 하수관을 끼워 넣고 남쪽 교대에도 배수용 토관을 설치한 공사. 오래된 교량과 왕릉 석재를 보존 대상보다 도시 배수 기반시설로 취급하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 후대 발굴과 해체 과정에서 이 시설의 흔적이 확인되어 근대의 훼손 이력을 파악하는 단서가 됨.

이극로가 독일 유학 중이던 1923년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고 무보수로 약 3년간 우리말을 가르침. 이광수의 《허생전》을 한글 교재로 만들어 활용했으며, 이 교재는 오늘날까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됨. 서양에서 이뤄진 한국어 교육의 효시로 평가됨.

이극로 허생전 강좌 교재로 사용된 작품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재일 조선인 위문반과 현지 조사원들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피살자를 총 6,661명으로 집계해 발표. 도쿄 1,781명, 가나가와현 3,999명 등 지역별 희생 규모를 제시한 조사 결과로, 일본 정부가 집계한 233명과 현격한 차이. 시신 인멸과 조사 방해로 정확한 피해 규모 확정에는 한계가 있으나, 현재까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전체 규모를 논할 때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당대 조사.

이광수가 장백산인이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허생전》 연재를 시작함. 박지원의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허생의 상업 활동과 이상 공동체 건설, 사회 개혁 구상을 대화와 사건 중심의 장편 서사로 확장한 고전 개작.

이광수의 《허생전》은 변 진사에게 만 냥을 빌리는 장면에서 시작해 안성장 과일 매점, 도적들의 규합과 새로운 공동체 건설, 이완과의 문답, 조정 개혁안 제시로 이어지는 서사. 박지원의 고전적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 원작에 없던 인물과 사건을 대폭 늘리고 구어적 서술을 활용해 당대의 민중 독자를 위한 장편소설로 재구성한 작품.

일본 정부가 1923년 11월 15일 현재 관동대지진 이후 발생한 살상 사건 가운데 조선인 사망자를 233명으로 집계. 사법 당국이 기소 대상으로 파악한 사건을 중심으로 산출한 수치로, 일본 군경이 직접 가담했거나 관헌이 방조한 사건, 기소되지 않은 자경단 학살과 은폐된 희생은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집계. 같은 해 『독립신문』이 발표한 6,661명과 큰 차이를 보이며, 이후 피해 규모와 일본 정부의 축소·은폐 책임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수치.

재일 조선인들이 1923년 10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 위문반’을 조직해 관동 지방의 생존 조선인을 구호하고 학살 피해 조사 착수. 조사원들이 학살 지역을 방문해 희생자 수와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유족과 생존자의 증언을 수집했으나, 시신 은닉과 훼손, 일본 당국의 감시와 조사 방해로 활동에 상당한 제약. 11월까지 이어진 조사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지역별 희생자 집계에 중요한 토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10월 29일 앙카라에서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1921년 헌법을 개정하여 국가의 정치체제를 공화국으로 명시하고 무스타파 케말(훗날 아타튀르크)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함. 1922년 술탄제 폐지, 1923년 로잔 평화조약과 앙카라 수도 지정에 이어 오스만 제국의 군주제에서 새 국민국가로 이행한 결정적 사건이며, 1924년 칼리프제 폐지와 신헌법 제정 등 공화국 초기의 제도 개혁으로 이어짐.

월트 디즈니가 뉴욕의 영화 배급업자 마거릿 윙클러 측과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 제작·배급 계약을 체결함. 월트와 형 로이 O. 디즈니가 함께 이끌던 디즈니 브라더스 카툰 스튜디오의 사업 기반이 마련됨.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창립일에 해당함. 초기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 사업에서 장편영화·캐릭터·테마파크·미디어 산업으로 확장된 기업 역사의 출발점으로 기록할 가치가 있는 계약.

울프가 작품의 과거를 필요한 순간마다 나누어 드러내는 방식을 자신의 ‘터널링 프로세스(tunnelling process)’라고 일기에 기록함. 현재와 기억을 한 서술 구조 안에서 연결하는 작품의 핵심 구성 원리가 됨.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앙카라를 국가의 수도로 정하는 법률을 통과시킴. 독립전쟁의 정치·군사적 중심지였던 앙카라가 새로운 국가체제의 수도로 확정된 결정으로, 같은 해 10월 29일 공화국 선포에 앞선 정치적 전환점.

오스만 제국 말기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하에 놓였고, 앙카라는 튀르키예 민족운동과 독립전쟁을 이끄는 중심지가 됨. 1923년 10월 13일 의회에서 앙카라를 수도로 삼는 법률이 통과됨.

앙카라 수도 지정과 10월 29일 튀르키예 공화국 선포는 서로 연결되지만 날짜가 다른 별개의 사건. 오스만 제국에서 공화국으로의 국가체제 전환을 보여주는 기록.

전후 수집된 증언과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 당국이 나라시노 수용소의 조선인 수용자 가운데 ‘사상이 이상하다’고 본 사람들을 영창에 가두고, 조선어에 능한 헌병 등을 수용자 사이에 투입해 조사함. 이 과정에서 일부가 이른바 ‘적당 처분’의 대상으로 분류되어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살해된 것으로 지적됨. ‘보호’ 명목의 수용이 감시·선별·살해와 함께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