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국민대표회의 부의장 취임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부의장에 취임함. 국내외 각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과 진로를 논의함. 진영 간 대립으로 성과 없이 결렬되었으나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통합 시도.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부의장에 취임함. 국내외 각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과 진로를 논의함. 진영 간 대립으로 성과 없이 결렬되었으나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통합 시도.
원세훈,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개막한 국민대표회의에 노령 한족 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에 가담. 임시정부의 조직과 헌법을 유지하면서 개편하자는 개조파와 대립함.
개조파가 회의에서 이탈한 뒤 창조파는 6월 초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국호를 조선공화국으로 정함. 원세훈과 김규식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창조파 인사들은 새로운 정부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같은 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그러나 이 조직은 소련 정부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해산됨.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함. 여성에게 협소했던 전문 미술 활동의 장에서 작업을 지속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수상과 입선으로 경력을 쌓았음.
버지니아 울프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평가하던 시기와 댈러웨이 장편 구상기가 겹침. 두 작품의 ‘도시의 하루’ 구조와 인물의 이동·기억·의식 서술은 이후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비교되어 왔으며, 울프의 작품은 조이스의 실험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것으로 논의됨.
1922년부터 1927년까지 경성 종로금융조합 조합장을 지냄.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금융조합을 식민지 금융수탈기구로 규정하고 안상호의 조합장 경력을 식민통치 협력 행적에 포함함.
카터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인력 지원을 받아 해리 버턴의 사진 촬영과 유물의 번호 부여·기록·보존을 병행하기 시작한 작업. 인근 세티 2세 무덤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원래 배치를 기록한 뒤 손상되기 쉬운 물건을 안정화하여 옮기는 방식의 적용. 금은보화의 반출을 넘어 장례용품 전체를 연구 자료로 남긴 조사 기반.
조선총독부령 제154호로 조선호적령 공포. 제3조에서 호주를 기준으로 한 집마다 호적을 편제하도록 규정한 식민지 신분등록 법령.
김명순이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The Assignation」을 「상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개벽』 제29호에 발표.
김명순은 번역문 뒤에 덧붙인 글에서 포의 문학적 가치를 강조. 김자경은 이 글을 포의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시 문단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
11월 26일의 첫 내부 관찰 이후 지방 관리와 초청객이 참석한 공식 개방 행사. 전실의 유물과 발견 성과가 외부에 소개되고 언론의 관심이 확대되었으나, 좁은 공간에 밀집한 취약한 유물 때문에 관람 접근과 보존을 조정해야 했던 출발점.
전날 첫 문을 개방하고 잔해로 채워진 통로를 치운 뒤 두 번째 봉인에 도달한 발굴팀. 카터가 작은 구멍을 내고 촛불로 전실을 살펴 금박 가구·전차·상자 등의 부장품을 확인한 순간으로, 왕의 석관이나 미라를 개방한 날과는 구별되는 발견.
발굴팀이 열여섯 계단과 첫 출입구 전체를 드러내면서 투탕카멘의 왕명이 찍힌 봉인을 확인한 단계. 문 윗부분에는 이전에 뚫었다가 다시 막은 흔적도 남아 있어, 완전히 손대지 않은 무덤이라는 최초의 기대와 고대 도굴의 증거가 함께 드러난 발견.
계단을 따라 내려간 발굴팀이 회반죽으로 봉인된 출입구의 윗부분과 왕실 묘지 인장을 확인한 단계. 아직 무덤 주인의 이름은 판독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카터는 발견 지점을 다시 보호하고 카나번 경의 도착을 기다리기로 한 조치.
카터가 지휘한 이집트 발굴팀이 람세스 6세 무덤 인근의 고대 작업자 오두막 아래에서 암반에 파인 계단의 첫 단을 확인한 발견. 오랫동안 잔해 아래 가려져 있던 투탕카멘 무덤의 입구를 찾은 단계이며, 다음 날 봉인된 문 확인과 같은 달 26일 전실 관찰로 이어진 출발점.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를 폐지하여 술탄의 세속적 통치권을 끝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립전쟁과 앙카라 정부 수립을 거친 제도 전환이며, 마지막 술탄 메흐메트 6세의 퇴장, 1923년 공화국 선포, 1924년 칼리파제 폐지로 이어짐. 술탄제 폐지와 칼리파제 폐지는 서로 다른 사건임.
김명순이 『개벽』 제28호에 에드거 앨런 포의 시 「대아」와 「헬렌에게」를 한국어로 번역해 발표.
김자경은 「헬렌에게」를 구리야가와 하쿠손의 일본어 번역과 비교해, 영어 원문과 다른 표현 일부를 일본어 번역의 영향으로 해석. 두 연을 하나로 합치는 등 원문과 일본어판에 없는 형식 변화에도 주목
1922년 10월 30일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요청으로 정부 구성에 나선 베니토 무솔리니가 31일 이탈리아의 새 연립내각을 구성함. 로마 진군 이후 정권 교체가 법률상·정치적으로 실현된 단계이며, 10월 28일 계엄령 승인 거부, 30일 총리 임명·정부 구성 요청과 날짜를 구분해야 함.
1922년 10월 28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이 파시스트 검은 셔츠단의 로마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가 준비한 계엄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함. 이 결정으로 루이지 팍타 내각은 무력 대응에 실패하고 총사퇴했으며, 무솔리니의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 공백이 확대됨. 무솔리니 자신은 당시 밀라노에 있었고 30일 로마에 도착해 정부 구성 요청을 받았으므로, 28일 무솔리니가 직접 로마를 점령했다는 기존 서술은 부정확함.
울프가 일기에 댈러웨이 이야기가 ‘책으로 뻗어나갔다’고 기록하고, 정신의 정상과 비정상, 자살을 함께 다루는 장편 구상을 명시함. 셉티머스 스미스라는 인물명도 이 기록에 등장함.
김승학 운영 아래 『독립신문』 상하이 중문판이 1922년 7월 20일 제1호 발행으로 창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중국 사회와 국제 여론에 알리고, 중국인과의 연대를 넓히기 위한 중국어 신문 발간. 국한문판과 병행해 간행되었으며, 1924년 말까지 약 40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