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세계인권회의)에 참석해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증언함. 국내를 넘어 국제 인권 무대에서 전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함. 이후 세계 각지를 돌며 증언을 이어가는 국제 활동의 출발점.
이벤트
총 7929건
오랜 침묵을 깨고 1992년 자신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힘.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일본군에게 당한 참상을 증언하며 국제 사회에 문제를 알림. 이 무렵부터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한 전환점.
1947년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한국으로 귀국함. 약 8년에 걸친 피해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시점. 이후 오랜 기간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 채 침묵 속에 지냄.
만 14세이던 1940년 일본군'위안부'로 강제 동원됨. 이후 약 8년간 중국·홍콩·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성노예 피해를 입음. 어린 나이에 겪은 이 피해가 훗날 전시 성폭력 근절 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됨.
김복동이 세계여성폭력철폐의 날을 맞아 '100만 시민이 함께 드리는 여성인권상'을 수상하고 상금 5천만원을 기부함.
기부금을 씨앗기금으로 무력분쟁 지역의 성폭력 피해자와 이를 지원하는 여성인권 활동가·단체를 지원하는 김복동평화상이 제정됨.
김복동이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해 달라며 5천만원을 기부함.
기부금을 바탕으로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원하는 김복동장학금 사업이 시작됐으며, 이후 장학생 지원과 학교 피해 복구 등으로 활동이 확대됨.
김복동이 동일본대지진 발생 뒤 일본의 재해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을 제안하고 첫 기부자로 참여함.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도 재난을 겪은 일본 시민들과는 연대한다는 평화·인권운동의 입장을 보여준 활동임.
김복동이 일본군 성노예제 책임을 다룬 여성국제법정에 피해자 원고단으로 참여함.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실상을 증언하고 일본 정부와 군 지도부의 책임을 묻는 국제 시민법정 활동에 참여함.
김복동이 미국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 추진을 지원하기 위한 증언 집회에 참석하고 미국 의회 등을 상대로 피해 사실을 증언·호소함.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국과 일본을 넘어 미국 정치권에 알리는 국제 활동을 이어감.
김복동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섬.
이후 국내외 증언과 국제회의 참석을 이어가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여성인권·평화운동가로 활동함.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남.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하던 중 일제강점기 말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피해를 입게 되는 인물. 훗날 전시 성폭력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대표적 증언자이자 인권운동가가 됨.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는 1926년 5월 1일, 김복동 공식 기념사업 사이트의 최근 약력은 1926년 4월 6일, 연합뉴스 등 당시 부고 기사들은 날짜를 특정하지 않고 1926년 출생으로 기록.
안창호가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에서 안흥국과 제남 황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출생함. 호는 도산(島山)이며, 이후 독립협회·신민회·흥사단·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교육가로 성장함.
수양동우회 사건 수감 중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한 안창호가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에서 별세함. 독립기념관 자료는 1937년 12월 24일 입원 뒤 사망했다고 기록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사인을 간경화증으로 설명함.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8월 15일 예심 종결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음.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한 뒤 같은 해 12월 24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에 입원함.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날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됨. 한국소년동맹회 지원금 전달차 이유필의 자택을 방문했다가 검거되어 국내로 압송됨. 그해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형을 선고받음.
1926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가 창립되고 같은 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로 개칭됨. 안창호와 원세훈이 중심이 되어 이념이 다른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려 함. 이후 관내와 만주 각지로 촉성회가 확산되는 민족유일당운동의 본격적 출발점.
국내에 흥사단 계열 단체가 두 개로 나뉘어 결성된 사실을 안 안창호가 1923년 3월 이광수를 베이징으로 불러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를 합동하도록 지시.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와 통일적 조직화를 겨냥한 조치. 이 지시가 1926년 두 단체의 통합과 수양동우회 결성으로 이어짐.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부의장에 취임함. 국내외 각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과 진로를 논의함. 진영 간 대립으로 성과 없이 결렬되었으나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통합 시도.
안창호가 미주 단원들을 상하이로 불러 1920년 9월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를 설치함. 미주에 한정되던 활동을 중국 지역으로 확장한 전환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한 상하이를 거점으로 국외 민족운동의 폭을 넓힌 계기.
1919년 6월 28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정식 취임함.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고 《독립신문》 발행을 주도하며 통합 임시정부 수립을 이끎. 초기 임시정부 운영의 실질적 중심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