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이래 한자 제호 ‘獨立’으로 제21호까지 발행하던 신문이 제22호인 1919년 10월 25일부터 ‘獨立新聞’으로 제호 변경. 이 한자 제호는 제168호까지 유지되었고, 제169호인 1924년 1월 1일부터 한글 제호 ‘독립신문’으로 다시 변경.
왕립학회·왕립천문학회, 일식 관측 결과 합동 발표
프린시페와 소브랄에서 얻은 건판 측정값을 종합해, 태양 가장자리 근처 별빛의 휘어짐이 일반 상대성이론의 예측과 부합한다고 발표함. 채택된 두 주요 측정 결과는 약 1.98초각과 1.61초각으로, 아인슈타인의 예측값 약 1.75초각을 지지함. 이튿날부터 영국과 국제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아인슈타인이 세계적 명사가 되는 전환점이 됨.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를 독립군 양성 기반으로 편성
한족회가 설치한 군정부가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로 개편. 이상룡이 독판, 여준이 부독판, 지청천이 사령관을 맡으며 남만주 무장 독립운동의 군정 조직 구성.
신흥무관학교는 서로군정서의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기능. 학교 운영 인사와 졸업생들이 군정서의 지휘부와 군사 조직에 참여하며, 교육기관·자치기관·독립군 조직이 결합한 체제 형성.
임희재 출생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서 출생. 훗날 희곡·시나리오·방송극을 집필하며 한국 전후 문학과 영화·방송에 참여한 작가.
파리강화회의, 국제연맹 창설 결정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국제기구 국제연맹의 규약이 채택되어 창설이 결정. 윌슨이 가장 역점을 둔 구상으로, 강화조약 안에 국제연맹 규약이 포함됨.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표방한 최초의 보편적 국제기구의 출발.
함석헌이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함. 일제 학교 당국이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해 퇴학당한 것으로 전해짐. 이후 약 2년간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로 일한 뒤 오산학교로 진학함.
김명순 『창조』 동인 참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명순이 전영택의 소개로 1919년 『창조』 동인에 참여했다고 설명.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도 동인 참여 연도를 1919년으로 기재.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창조』 항목은 김명순의 참여를 제7호부터로 구분.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기록된 제7호 발행일은 1920년 7월 25일.
1919년은 동인 참가 연보상의 연도이며, 실제 지면 참여는 1920년 제7호부터 확인
나혜석, 3·1운동 관련 활동으로 투옥
여성 지식인들의 독립운동 관련 모임과 활동에 관여하여 체포되고 수개월 동안 수감됨. 구체적인 시위 참여와 세부 행적에는 자료별 차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