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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19년의 기록 54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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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에 큰불이 나 함녕전·중화전·즉조당·석어당 등 주요 전각이 소실됨. 황궁의 중심부가 피해를 입으면서 고종은 수옥헌, 뒤의 중명전을 거처이자 집무 공간으로 사용하게 됨. 이후 전각을 다시 짓는 과정에서 규모와 형태가 달라져, 현재의 덕수궁을 이해할 때 화재 이전과 재건 이후를 구분해야 하는 계기가 됨.

덕수궁 중명전

1904년 4월 22일 뉴욕에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출생. 독일계 이민자 출신의 섬유 수입업자 아버지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와 화가였던 어머니 엘라 프리드먼 사이에서 성장했으며, 뉴욕 윤리문화학교를 거쳐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함.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에 재정·외교 고문을 두도록 한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한 사건.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의 의견을 재정과 외교에 반영하고 중요한 외교 사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하게 한 조치. 일본의 대한제국 내정 및 대외 교섭 통제를 강화한 고문정치의 제도화.

1904년 10월 27일 인터버러 급행철도(IRT)가 뉴욕 시청에서 맨해튼 145번가까지 이어지는 첫 지하 노선을 개통함. 이미 존재하던 고가철도와 구분되는 지하 고속철도의 출발점이었음.

대량 수송을 통해 도시의 통근 범위와 주거지 확대를 뒷받침했으며, 이후 다른 운영망의 건설·통합을 거쳐 현대 뉴욕 지하철로 발전함.

석방된 이승만이 미국 유학과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을 위한 외교활동을 위해 서울을 떠남.

1904년 11월 4일, 이승만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음.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이 번역한 영문일기는 이날 오후 서울에서 출발하는 기록으로 시작함. 그는 같은 해 8월 한성감옥에서 풀려난 뒤, 민영환과 한규설 등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한국의 독립 보전을 호소할 길을 찾았음.

그의 미국행은 유학과 외교활동이 함께 진행되는 출발점이었음. 1905년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입학한 뒤 미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한국 문제를 알렸고, 같은 해 8월에는 윤병구와 함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 보전을 요청했음. 그러나 미국의 대일 정책을 바꾸거나 한국의 주권을 보호할 구체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음.

1902년 11월부터 1904년 10월까지 이어진 19회 연재를 바탕으로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를 두 권의 책으로 출간. 의회와 주 의회 조사, 법정 증언, 철도 계약 등 흩어진 기록을 종합해 다수의 독립 사업자가 소수의 거대 조직 아래 놓이게 된 과정을 추적한 작업. 경쟁자들의 피해뿐 아니라 회사 측의 설명도 조사했으며, 록펠러의 조직 능력과 산업 안정화 효과를 인정하면서 경쟁 억제 수단을 비판한 서술. 책은 복잡한 기업사를 일반 독자가 논의할 수 있는 공적 문제로 바꾸며 독점 비판을 확산. 1911년 스탠더드 오일 분할의 사회적 배경 가운데 하나였지만, 법적 분할 자체는 별도의 연방정부 소송과 연방대법원 판단에 따른 결과.

일본계 이민자 미야모토 조타로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포목·양품점 '무사시야'를 엶. 일본 기모노 직물을 다루던 이 점포는 뒷날 아들 미야모토 고이치로 대에 화려한 무늬의 셔츠를 지어 파는 가게로 이어짐. 알로하 셔츠의 기원으로 거론되는 초기 점포 중 하나의 출발점.

1904년 귀국한 뒤 언더우드의 비서로 일하는 한편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교사·학관장·학생부 간사 등으로 활동하고 경신학교 교사와 교감을 역임. 1910년 새문안교회 장로로 선출되고, 1911년 경기·충청도 장로교연합회 서기, 1912년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등 교육계와 개신교계에서 활동. 1913년 4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국내 활동을 마무리함.

김규식 (우사)

프랑스 공교육 확대와 함께 일반 학급의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운 아동에게 어떤 교육을 제공할 것인지가 정책 과제로 떠오르자 1904년 공교육부가 관련 위원회를 구성함. 비네도 위원으로 참여해 교사나 의사의 주관적 인상에만 의존하지 않는 판별 방법을 모색함.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적·의학적 검사와 함께 아동의 현재 지적 수행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방법이 요구됨. 비네와 테오도르 시몽의 연구가 이듬해 첫 지능 측정 체계 발표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제도적 배경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