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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19년의 기록 35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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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자, 일제가 태극기의 공식 사용을 금지하고 일장기를 강요함. 공적 영역에서 사라진 태극기는 도리어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상징하는 표상이 되어, 이후 독립운동의 깃발로 되살아나는 계기가 됨.

통감부가 1909년 발행인 어니스트 베델의 사망 뒤 대한매일신보 매수를 추진하고, 1910년 5월 신문을 장악함. 한일병합조약 공포 다음 날인 1910년 8월 30일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을 떼고 제호를 매일신보로 변경. 한말 항일 민족지가 조선총독부의 한국어 기관지로 전환된 상징적 사건.

매일신보

1910년 12월 15일자 《매일신보》는 교육기본금관리회가 관리하던 국채보상금 9만여 원이 12월 12일 총감부에 납입되고, 국채보상금총합소 관계자들이 관리하던 4만 2,000원이 12월 14일부터 경무총감부 보관으로 이전되었다고 보도함. 교육사업에 사용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국민이 모은 의연금이 일제 통치기구의 관리 아래 들어간 국채보상운동의 사실상 마지막 단계.

안창호가 국권피탈 전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거점을 모색함. 산둥성 칭다오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회의를 열고 북만주에 집단 거주지와 군사교육 기반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자금 부족과 노선 차이로 실현하지 못함.

경학사 조직 뒤 이회영·이동녕·이관직·이상룡·윤기섭 등이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鄒家街)에 신흥강습소 설립. 국내에서 모여든 청년에게 구국 이념과 항일 의식을 교육하고, 독립운동의 중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

중국 당국과 일제 관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학교보다 낮은 등급의 교육기관처럼 보이는 ‘강습소’ 명칭 사용. 실제로는 군사교육을 병행한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운영되었으며,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신흥무관학교

1911년 10월 18일 파리에서 54세로 사망함. 같은 해까지 지능척도 개정과 아동 심리 연구를 계속했으며, 사망 당시에도 소르본 심리학 연구소와 『심리학 연보』를 이끌고 있었음.

비네 사후 연구소와 학술지는 앙리 피에롱에게 이어졌고, 비네-시몽 척도는 프랑스 밖에서도 여러 형태로 번안됨. 특히 미국에서는 루이스 터먼의 개정을 거쳐 스탠퍼드-비네 검사로 발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