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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19년의 기록 54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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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19 · 10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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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시라스 3세가 촬영한 야생동물 사진을 집중적으로 소개함. 섬광과 원격 촬영 장치를 활용해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던 밤의 동물 행동을 보여 줌. 자연을 관찰하는 촬영 기술과 대중 잡지의 시각적 설명이 결합한 사례로, 이후 야생동물 사진 보도의 중요한 기반이 됨.

맥클루어의 사업 확장 계획을 둘러싼 갈등 끝에 1906년 3월 기존 잡지를 떠난 타벨과 동료 편집진. 존 필립스, 레이 스태너드 베이커, 링컨 스테펀스 등과 자금을 모아 기존 《아메리칸 매거진》을 인수하고 같은 해 10월 자신들의 첫 호를 발행. 은행과 보험 등까지 결합하려던 맥클루어의 구상은 이들이 비판해 온 투기적 사업 방식과 닮았다는 우려를 낳은 배경. 새 매체에서는 관세와 산업, 사회문제를 다루며 기자와 편집자의 전문적 수단으로 공적 논쟁에 참여한다는 방향을 유지. 유명 기자의 독립이 단순한 이직을 넘어 자본 조달과 공동 경영의 책임까지 수반한 사건.

마리 퀴리가 1906년 11월 5일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교에서 물리학 강의를 처음 진행함. 같은 해 사망한 남편 피에르 퀴리의 강좌를 이어받은 것으로, 소르본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수 강의를 맡은 사례 가운데 하나임. 여성의 고등교육 및 과학계 진출과 방사능 연구사의 중요한 이정표임.

미국 정부가 뉴저지의 스탠더드 오일과 계열사 등을 상대로 셔먼법 위반 소송을 제기한 사건. 장기간의 기업 인수와 주식 지배, 철도·송유관을 둘러싼 차별적 거래 등으로 석유산업의 경쟁을 제한하고 독점력을 유지했는지가 주요 쟁점. 1892년 오하이오주의 회사법 소송과 달리 연방 반독점법을 근거로 결합의 해체를 요구한 절차이며, 1909년 하급심의 해체 명령과 1911년 연방대법원 판단으로 이어진 연방정부의 독점 규제.

대화재로 훼손된 경운궁의 주요 전각을 다시 짓고 궁궐 체계를 정비함. 중화전은 화재 이전의 중층 건물보다 규모를 줄인 단층 형태로 재건되었으며, 동쪽의 대안문을 수리하고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꿈. 대한문이 정문 역할을 맡으면서 궁궐의 출입 방향과 중심 동선에도 변화가 생김.

WSPU가 런던 클레먼츠 인에 본부를 두고 중앙 정치권을 직접 압박하는 활동을 확대함. 의회와 정부가 있는 수도를 중심으로 조직·모금·홍보를 결합하면서, 맨체스터에서 출발한 운동이 전국적인 정치 운동으로 성장할 기반을 마련함.

마리아 몬테소리가 1907년 1월 6일 이탈리아 로마 산로렌초 지역 비아 데이 마르시 53번지에서 첫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열었음. 빈곤층 가정의 유아가 준비된 환경에서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 재료와 교실을 구성했으며, 이 실천이 몬테소리 교육법으로 발전하는 출발점이 됨. 어린이를 수동적 교육 대상이 아닌 자율적으로 학습하는 주체로 보는 관점이 확산하는 계기.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에서 문회명을 대동광문회로 바꾸기 위한 특별회가 열림. 부사장 서상돈이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고 제안하고, 사장 김광제 등 참석자들이 호응함. 김광제는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버리고 3개월치 담뱃값 60전과 별도 의연금 10원을 내놓았으며, 참석자들이 즉석에서 약 2,000원을 모금함.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의 출발점.

국채보상운동

《대한매일신보》가 1907년 2월 21일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를 가장 먼저 게재한 뒤 기사·논설·기고와 의연금 광고를 통해 운동을 지속적으로 알림. 의연자가 급증하자 지면을 확대하고, 명단을 모두 싣지 못할 때에는 별도 부록을 발행해 성명과 금액을 공개함. 언론을 통한 공개 모금이 대구에서 시작된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핵심 기반이 됨.

국채보상운동

1907년 2월 21일 김광제와 서상돈 등이 작성한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됨. 대한제국 국민 약 2,000만 명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매달 20전씩 모아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갚자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함. 대구에서 시작된 제안이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고 각지의 단연회와 국채보상단체 결성으로 이어지는 계기.

대한제국 국채보상운동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김성희·유문상·오영근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와 회칙을 마련함. 국민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갚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서점·약국·《대한매일신보》사·잡지사 등을 의연금을 받는 수전소로 지정함. 서울에 모금·보관 체계가 마련되면서 각 지역과 계층의 국채보상 조직 결성이 확산됨.

국채보상운동

1907년 3월 15일 서울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가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를 게재하고 전국 여성의 참여를 호소함. 여성도 국가의 혜택을 받는 백성으로서 국채 보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밝히고, 신분과 관계없이 의연금을 낸 사람을 회원으로 인정함. 이후 각지에서 부인감찬회·패물폐지부인회·탈환회 등 여성 단체가 조직되고 패물과 생활비를 절약한 돈을 기부하면서 운동의 참여 기반이 확대됨.

국채보상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