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러리 버티넬리 출생
미국의 배우 밸러리 버티넬리.
미국의 배우 밸러리 버티넬리.
아서 펜이 《미라클 워커》로 제14회 토니상 연극 연출상을 수상함. 같은 프로덕션은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도 수상함.
4월혁명과 전국적 퇴진 요구 속에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음. 사임서는 다음 날 국회에 송부되었으며, 국회 본회의의 사임서 선포는 5월 3일 이루어짐.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음. 3·15 부정선거와 경찰의 유혈진압에 맞선 학생·시민의 저항이 이어졌고, 전날 대학교수단까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뒤였음. 성명에는 정부통령 선거의 재실시, 이기붕의 공직 퇴진, 내각책임제 개헌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도 포함됨.
4월 26일은 하야 의사를 공개한 날임. 대통령기록관이 공개한 기록에 따르면 이승만의 사임서는 4월 27일자로 국회의장에게 송부되었고, 대통령기록관은 이날을 공식 사임일로 설명함. 국사편찬위원회 헌정사 자료는 5월 3일 제35회 국회 제13차 본회의에서 4월 27일자 사임서가 선포되었다고 구분함.
이승만의 퇴진으로 1948년부터 이어진 집권은 끝났고, 허정의 과도정부를 거쳐 내각책임제 개헌과 제2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짐. 하야는 대통령 개인의 결단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부정선거를 거부하고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였음.
이승만은 이날 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전날 밤에야 3·15 선거가 불법적으로 치러졌음을 알았다고 설명했음. 그러나 대사의 4월 19일과 21일 보고에는 이미 이승만에게 부정선거와 경찰 탄압을 직접 설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 전날 밤에야 알았다는 설명은 이미 직접 통보받은 기록과 어긋나는 해명이었음.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하여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려고 공산당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 번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 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행해 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이 다 힘써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 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1960년 4월 28일 새벽 경무대 인근 관사에서 전 국회의장 이기붕과 부인 박마리아, 아들 이강석·이강욱 등 일가족 네 명이 총상으로 사망한 채 발견됨. 당국은 가족 간 총격 뒤 자살한 사건으로 발표했으며, 사건의 경위에 관한 논란도 이어진 사건.
1960년 4월 28일 전 국회의장 이기붕이 서울 경무대 관사에서 가족과 함께 사망함. 4·19 혁명과 이승만 정권 붕괴 직후 발생한 이기붕 일가 사망 사건.
미국 정부 인쇄국(GPO)을 통해 'COBOL Report Apr60'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판 및 배포
『사상계』는 함석헌·천관우 등 비판적 지식인의 글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권위주의 통치, 분단 현실과 민주주의의 과제를 꾸준히 다룸. 이러한 논의는 학생·지식인층 사이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성찰하는 지적 토대를 형성함.
4·19 혁명 뒤에는 학생과 시민의 저항을 민주혁명으로 해석하고, 새 민주정치의 방향과 장면정부의 과제를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지면을 마련함. 『사상계』가 혁명을 직접 조직한 주체는 아니었으나, 4·19 전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담론을 형성하고 확산한 대표적 종합교양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됨.
4·19혁명 직후 유현목·김학성·김성춘이 공동 제작에 착수. 자금난으로 촬영 중단과 재개를 반복.
CBS가 정규편성을 중단하고 4·19혁명 시위 현장을 특집으로 보도함. 종로2가 사옥 옥상에서 시위 상황을 중계하고 전 직원을 보도 제작에 투입함. CBS가 1960년 사업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오토 디캠프 국장과 간부진도 숙직하며 뉴스 제작을 지휘함.
미국의 고고도 정찰기 U-2가 소련의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상공에서 S-75(SA-2)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 당시 U-2는 파키스탄에서 이륙해서 소련의 군사 시설을 촬영하기 위해 소련 영공에 진입했으나 소련의 미사일에 피격됐고, 미국은 처음에는 기상 관측기가 경로를 이탈했다고 발표하면서 스파이 행위를 부인했으나 소련이 생포한 조종사와 기체 잔해, 정찰 사진을 공개하며 미국의 거짓말을 공개함.
이 사건으로 파리에서 열릴 미소 정상회담이 취소. 추후 영화 <스파이 브릿지>로 만들어짐.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3·15 부정선거와 군 내부 비리의 책임을 물어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의 사퇴를 요구함. 4·19혁명 이후 군부의 부패와 인사 문제를 제기한 정군운동의 한 계기.
4·19혁명 뒤 노동조합 내부의 개편 요구가 확산되는 가운데 대한노총 간부들이 총사퇴한 사건. 기존 지도체제의 공백 속에 수습위원회를 통한 재조직과 조직 해체 여부를 둘러싼 논의가 이어지고, 전국노협과의 통합 모색으로 연결된 변화.
현지 시각 15시 11분, 칠레 발디비아 앞바다에서 계측 사상 최대 규모인 9.5의 초대형 지진(발디비아 대지진)이 발생. 수소폭탄 수십 개에 달하는 위력을 낸 이 지진은 진앙지 칠레뿐만 아니라 태평양 건너 하와이와 일본 등지에도 막대한 쓰나미 피해를 남김.
일본의 영화 감독 안노 히데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