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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의 기록 162건

37년 전.한 해의 기록을 월별로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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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에프런과 앨리스 알렌이 공동 각본을 쓴 범죄 코미디 《쿠키》가 미국에서 개봉함. 수전 세이들먼이 연출하고 피터 포크, 에밀리 로이드, 다이앤 위스트가 출연함.

감옥에서 나온 갱스터 아버지와 그에게 반발하면서도 재능을 발휘하는 딸 쿠키의 관계를 그린 작품. 《실크우드》를 함께 썼던 에프런과 알렌이 다시 협업했으며, 노라는 제작총괄에도 이름을 올림.

노라 에프런 공동각본, 제작총괄

보이저 2호가 해왕성계를 통과하며 트리톤을 가까이에서 촬영하고 대기를 측정함. 표면에는 오래된 충돌구가 빽빽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매끈한 평원과 독특한 굴곡 지형이 나타났으며, 어두운 물질을 뿜어내는 분출 기둥도 확인됨.

이 탐사로 트리톤은 단순히 얼어붙은 위성이 아니라 표면이 변화하는 천체로 이해되기 시작함. 다만 관측된 분출을 곧바로 지하 바다의 물이 솟는 현상으로 볼 수는 없으며, 표면의 질소 얼음과 태양열이 관여하는 과정도 검토해야 함.

트리톤 (해왕성의 위성)

여름 휴지기를 마친 평화기도에 약 1천 명이 모이고, 예배 뒤 시민운동가들이 교회 앞에서 현수막을 펼침. 슈타지 요원들이 이를 빼앗는 장면이 박람회를 취재하던 서방 언론을 통해 알려짐. ‘우리는 여기에 남겠다’는 외침은 출국의 자유뿐 아니라 동독 안에서 삶과 정치를 바꾸려는 요구가 함께 존재했음을 보여 줌.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경찰과 국가보안기관이 평화기도 뒤 모인 사람들을 강경하게 해산하고 다수의 참가자를 체포함. 일부는 벌금형이나 구금형을 받았으며,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후 집회에서 중요한 의제로 떠오름. 월요 시위의 ‘평화로움’은 처음부터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억압의 위험 속에서 비폭력을 지키려 했다는 의미를 지님.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데즈먼드 투투와 앨런 보잭, 케이프타운 시장 고든 올리버 등이 약 3만 명의 시민과 함께 케이프타운 도심을 행진. 인종분리 선거를 둘러싼 경찰의 유혈 진압에 항의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요구한 평화 시위로, 이후 다른 도시의 대규모 평화 행진으로 이어진 민주화 전환기의 주요 사건.

의회도서관장이 첫 국립영화등기부 선정작 25편을 발표함. 법률로 마련한 제도가 실제 작품 목록을 선정하는 단계로 이어졌음.

최근 흥행작을 즉시 평가하는 시상식과 달리, 제작 후 적어도 10년이 지난 작품을 대상으로 시간적 거리를 두고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이었음. 이후 매년 이루어지는 선정은 개별 작품에 관심을 모으는 동시에 영화유산 전체의 보존 필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음.

미국 국립영화등기부

약 5천 명의 시위대가 교회 주변의 경찰 봉쇄를 뚫고 도심을 둘러싼 순환도로인 링으로 진출함. 한 장소에 머무르던 항의가 도심을 행진하는 형태로 확대되면서 더 많은 시민이 시위를 직접 보고 참여할 수 있게 됨. 이후 링은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음.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할리 베리가 에밀리 역으로 출연한 ABC 시트콤 《리빙 돌스》(Living Dolls)의 첫 방송. 모델 지망생들을 다룬 코미디에 고정 출연하며 텔레비전 연기를 시작했고, 이후 《노츠 랜딩》 등으로 방송 경력을 이어 간 인물. 장편영화 《정글 피버》에 앞선 초기 배우 활동.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지지 야외공연으로 확대함. 대학 총학생회·지역 단체와 함께 노래와 연극, 풍물을 결합하여 해직 교사 문제와 민주화 요구를 공연에 담음.

소극장 대화형 공연에서 대규모 사회참여 공연으로 활동 범위가 넓어진 계기가 됨.

참가자가 늘어나면서 평화기도가 개혁교회에서도 열리고, 약 2만 명이 링을 따라 행진함. 경찰은 행진을 막으려 했으며 일부 구간에서는 방패·곤봉과 경찰견을 동원해 개입함. 집회의 급성장과 강경 대응이 맞물리면서 다음 주 월요일에 더 큰 충돌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짐.

성 니콜라이 교회를 비롯한 네 교회의 평화기도 뒤 약 7만 명의 시민이 도심을 행진함. 무력 진압의 우려 속에서 참가자들은 ‘우리가 인민이다’, ‘폭력을 쓰지 말라’고 외쳤으며 정치적 자유와 개혁을 요구함. 보안 병력은 물러났고 집회는 유혈 진압 없이 끝나, 이후 대중운동이 더 넓게 확산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됨.

시민운동가들은 시위대와 보안 병력 모두에게 비폭력을 촉구하는 전단을 배포함.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를 포함한 지역 인사 여섯 명도 대화를 호소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함. 이 같은 호소와 시민들의 비폭력적 행동, 압도적인 참가 규모, 현장 지휘의 판단을 함께 고려해야 하며, 진압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한 사람의 공로로만 환원하기는 어려움.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독일 재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