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외교 노선
대한제국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개화·민권운동에 참여했으며, 투옥 중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독립정신》을 집필함. 출옥 후 미국에서 학업과 외교활동을 이어갔고, 하와이에서는 한인 교육과 출판, 교민조직을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삼았음. 미국 정부와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독립 노선을 중시했으나, 열강의 한국 독립 보장과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지는 못했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와 통합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됨. 같은 해 정한경과 함께 장래의 독립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청한 일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한 동료들의 비판을 받았음. 장기간의 미국 체류, 구미위원부의 운영과 미주 재정 처리, 임시정부의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 누적되어 1925년 임시의정원에서 탄핵·면직됨. 이후에도 독립 외교를 계속했고, 1941년에는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을 맡았음.
분단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해방 후 미·소의 분할 점령,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속에서 통일정부 수립은 난관에 부딪힘. 이승만은 1946년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에 먼저 정부를 세우는 노선을 공개적으로 제시했으며, 김구·김규식 등의 남북협상 노선과 갈라섰음. 분단은 국제정세와 남북 정치세력의 선택이 겹친 결과였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추진 역시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선택이었음.
1948년 5·10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제헌국회 의장을 맡았으며, 헌법 제정 과정에서 대통령제를 주장함.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됨. 헌법과 의회에 기반한 공화국의 출범이었으나, 남북에 별도 정부가 들어서면서 통일정부 수립은 실현되지 못했음.
농지개혁과 사회경제 변화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제정·시행하여 지주의 농지를 유상으로 매수하고 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함. 농지개혁은 지주·소작 관계를 크게 약화시키고 자작농 중심의 토지 소유를 확대했음. 해방 이후 농민의 토지 요구, 북한의 토지개혁과 미군정의 귀속농지 분배가 선행했으며, 조봉암 등 농림부 인사와 국회도 법안 형성과 시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 전쟁과 상환 부담, 영세한 농가 규모로 농민 생활의 불안정은 계속되었음.
전쟁과 한미동맹
1950년 북한의 전면 남침 이후 이승만 정부는 미국과 유엔군의 지원 아래 전쟁을 수행함.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으며, 전쟁의 파괴와 피란 속에서 국가의 존속과 국민 보호라는 과제에 직면했음. 이승만은 분단을 남기는 정전에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으며, 1953년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해 유엔군사령부와 충돌함.
정전 전후의 교섭에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장기적인 안보 보장과 원조를 요구했고, 미국은 한국의 독자적인 북진으로 전쟁이 재개되는 것을 막으려 했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후속 합의는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으며, 전후 안보와 미군 주둔의 제도적 토대가 됨. 조약은 공동 위험에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대응하도록 규정함.
권위주의 통치와 정치탄압
반공주의는 대외 안보 노선뿐 아니라 국내 반대세력을 배제하는 명분으로도 사용됨. 이승만은 친일행위를 조사한 반민특위의 활동에 반대하고 특별경찰대 해산을 지시했으며, 경찰의 1949년 6·6 습격 이후 친일 청산은 크게 후퇴함. 1952년에는 계엄과 의원 체포로 국회를 압박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관철했고, 1954년에는 자유당이 사사오입 논리로 부결 결과를 뒤집어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앰.
정치적 경쟁자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탄압은 정당 활동과 평화통일론을 제약함. 조봉암은 1959년 처형되었으나, 사형의 핵심 근거가 된 간첩 혐의와 진보당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은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로 판단됨.
국가폭력과 대통령의 책임
제주4·3은 미군정기 경찰 발포와 탄압, 1948년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거쳐 확대됨.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 방침을 지시했으며, 군·경은 마을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재판 없이 살해함.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진압 지휘관들의 책임과 함께 이승만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고 판단함.
한국전쟁 초기에는 군·경이 국민보도연맹원과 좌익 혐의자로 분류된 주민들을 예비검속한 뒤 여러 지역에서 집단살해함. 희생자에는 좌익 활동과 무관하게 보도연맹에 가입된 주민들도 포함됨. 진실화해위원회는 울산 사건 등에서 국가기관의 불법 처형을 확인하고, 현장 집행과 군 지휘체계, 대통령의 최종 책임을 구분하여 규명함. 이러한 조사 결과는 국가의 조직적 가해와 통치 책임을 드러내며, 지역별 명령 경로와 개별 행위에 대한 판단은 각각의 조사에 근거함.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행정·경찰 조직과 자유당이 사전투표, 공개투표, 야당 참관 방해 등 대규모 부정을 저지름. 마산의 항의 시위와 경찰 발포, 김주열의 시신 발견에 이어 학생·시민의 저항이 전국으로 확대됨. 4월 19일 경찰의 유혈진압과 정부의 계엄 선포 뒤에도 퇴진 요구가 계속되었고, 대학교수단도 시위에 참여함.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이튿날 사임서를 국회에 보냄. 그의 퇴진은 부정선거와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이 가져온 결과였음.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떠났으며, 생전에 귀국하지 못하고 1965년 현지에서 사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