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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29년의 기록 39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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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사에서 오늘날의 몽촌토성이 이리토성이라는 이름으로 보고됨. 이후 백제의 한성 도읍지와 성곽을 찾는 연구에서 이 유적의 위치와 성격이 논의되었음.

당시의 기록은 현대적인 대규모 발굴 이전에 성곽의 존재가 조사되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임. 성 내부의 구조와 생활상을 밝히는 본격적인 발굴은 1980년대에 이루어짐.

1921년 7월 초 김승학이 『독립신문』 2대 사장에 취임. 초대 사장 겸 주필 이광수와 영업부장 이영렬의 이탈 뒤 일본 영사관의 항의와 프랑스 영사관의 조치로 신문사와 인쇄소가 봉쇄된 상황에서, 안창호와 신문사 해제 방안을 논의하고 프랑스 영사관과 교섭함. 그 결과 음력 5월 말 신문사와 인쇄소가 다시 개방되었고, 사장 김승학·주필 박은식·편집국장 차리석 체제로 운영 기반 재정비.

안창호 독립신문 상하이판

이승만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동지회 결성을 주도했음. 동지회는 임시정부 옹호와 교민 단결을 표방하며 그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했음.

1921년 7월, 이승만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동지회 조직을 주도했음.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지도체제와 독립운동 방략을 둘러싼 갈등을 겪고 하와이로 돌아온 직후였음. 단체는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교민의 단결을 도모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으며, 이승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결집시켰음.

동지회는 《태평양잡지》를 활동의 매개로 삼고, 1924년 하와이 한인대표회를 계기로 조직과 정강을 정비했음. 정치적 독립운동 지원과 함께 교민의 경제적 역량을 키우려 했으며, 동지식산회사 운영과 동지촌 건설도 추진했음. 그러나 자본 부족과 경영난 속에 회사가 파산하면서 경제적 자립 구상은 좌절됨.

동지회는 이후에도 이승만의 중요한 정치적 후원조직으로 남았음. 동시에 다른 한인 단체들과 대표권과 재정, 외교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겪었음. 하와이 활동은 교육과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과정이면서, 교민사회의 분열과 지도권 경쟁이 함께 나타난 과정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