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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29년의 기록 25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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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7일부터 9일까지 일본군이 나라시노 수용소의 조선인 일부를 다카쓰·오와다신덴·가야타 등 인근 마을에 넘김. 주민 일기와 전후 증언에 따르면 각 지역의 자경단과 주민들이 인계받은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다카쓰에서는 6명의 희생이 확인됨. 군이 ‘보호’ 수용자를 민간에 인계하고 지역 주민의 살해가 뒤따른 사건.

빈에서 열린 제2차 국제형사경찰회의에서 20개국 대표가 국제형사경찰위원회(ICPC) 창설에 합의한 사건. 위원회는 국가 간 직접 경찰 연락, 체포·범죄인 인도 협력, 위조화폐·여권 정보 공유와 지문 기록 등의 국제 공조 체계를 구축했으며, 1956년 현대화된 헌장을 채택하면서 오늘날의 국제형사경찰기구(ICPO-INTERPOL)로 개편됨.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 헌병대원이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여성해방운동가 이토 노에, 오스기의 여섯 살 조카 다치바나 소이치를 연행해 살해한 아마카스 사건 발생. 세 사람의 시신은 헌병대 건물 안 우물에 유기. 관동 대지진 이후의 계엄과 혼란을 이용해 국가가 경계하던 사상운동가와 어린이까지 제거한 관헌 주도의 정치적 살해로, 가메이도 사건 및 조선인 학살과 함께 당시 국가 폭력의 성격을 보여 주는 사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전후 수집된 증언과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 당국이 나라시노 수용소의 조선인 수용자 가운데 ‘사상이 이상하다’고 본 사람들을 영창에 가두고, 조선어에 능한 헌병 등을 수용자 사이에 투입해 조사함. 이 과정에서 일부가 이른바 ‘적당 처분’의 대상으로 분류되어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살해된 것으로 지적됨. ‘보호’ 명목의 수용이 감시·선별·살해와 함께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재일 조선인들이 1923년 10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 위문반’을 조직해 관동 지방의 생존 조선인을 구호하고 학살 피해 조사 착수. 조사원들이 학살 지역을 방문해 희생자 수와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유족과 생존자의 증언을 수집했으나, 시신 은닉과 훼손, 일본 당국의 감시와 조사 방해로 활동에 상당한 제약. 11월까지 이어진 조사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지역별 희생자 집계에 중요한 토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 정부가 1923년 11월 15일 현재 관동대지진 이후 발생한 살상 사건 가운데 조선인 사망자를 233명으로 집계. 사법 당국이 기소 대상으로 파악한 사건을 중심으로 산출한 수치로, 일본 군경이 직접 가담했거나 관헌이 방조한 사건, 기소되지 않은 자경단 학살과 은폐된 희생은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집계. 같은 해 『독립신문』이 발표한 6,661명과 큰 차이를 보이며, 이후 피해 규모와 일본 정부의 축소·은폐 책임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수치.

이광수가 장백산인이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허생전》 연재를 시작함. 박지원의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허생의 상업 활동과 이상 공동체 건설, 사회 개혁 구상을 대화와 사건 중심의 장편 서사로 확장한 고전 개작.

이광수의 《허생전》은 변 진사에게 만 냥을 빌리는 장면에서 시작해 안성장 과일 매점, 도적들의 규합과 새로운 공동체 건설, 이완과의 문답, 조정 개혁안 제시로 이어지는 서사. 박지원의 고전적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 원작에 없던 인물과 사건을 대폭 늘리고 구어적 서술을 활용해 당대의 민중 독자를 위한 장편소설로 재구성한 작품.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재일 조선인 위문반과 현지 조사원들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피살자를 총 6,661명으로 집계해 발표. 도쿄 1,781명, 가나가와현 3,999명 등 지역별 희생 규모를 제시한 조사 결과로, 일본 정부가 집계한 233명과 현격한 차이. 시신 인멸과 조사 방해로 정확한 피해 규모 확정에는 한계가 있으나, 현재까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전체 규모를 논할 때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당대 조사.

이극로가 독일 유학 중이던 1923년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고 무보수로 약 3년간 우리말을 가르침. 이광수의 《허생전》을 한글 교재로 만들어 활용했으며, 이 교재는 오늘날까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됨. 서양에서 이뤄진 한국어 교육의 효시로 평가됨.

이극로 허생전 강좌 교재로 사용된 작품

『독립신문』이 1924년 1월 1일 제169호부터 한자 제호 ‘獨立新聞’을 한글 ‘독립신문’으로 변경. 1919년 창간호부터 제21호까지 사용한 ‘獨立’, 제22호부터 제168호까지 사용한 ‘獨立新聞’에 이은 세 번째 제호. 김승학 운영 아래 한인 독자를 위한 국문 표기를 제호에 반영한 변경.

이광수가 『동아일보』 1면에 「민족적 경륜」을 5회에 걸쳐 연재함. 정치·산업·교육 분야의 결사를 조직하고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민족의 당면한 권리와 이익을 확보하자고 주장함.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타협적 자치론이라는 비판과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불러왔으며, 이광수가 동아일보사를 떠나는 계기가 된 논설.

이광수 (춘원)

라울 월시 감독과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제작한 무성 판타지 영화 《바그다드의 도둑 (The Thief of Bagdad)》 개봉. 바그다드와 몽골, 이슬람 건축, 중국풍 의상과 가상의 마법 세계를 하나의 시각적 공간으로 결합한 작품.

중동과 중앙아시아·동아시아의 문화적 차이를 지우고 서구 관객을 위한 화려한 ‘동양’으로 재구성한 대표 사례. 중국계 미국인 배우 애나 메이 웡은 몽골인 노예로 등장해 이국적이고 위험한 동양 여성의 역할을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