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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29년의 기록 39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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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이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The Assignation」을 「상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개벽』 제29호에 발표.

김명순은 번역문 뒤에 덧붙인 글에서 포의 문학적 가치를 강조. 김자경은 이 글을 포의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시 문단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

김명순

카터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인력 지원을 받아 해리 버턴의 사진 촬영과 유물의 번호 부여·기록·보존을 병행하기 시작한 작업. 인근 세티 2세 무덤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원래 배치를 기록한 뒤 손상되기 쉬운 물건을 안정화하여 옮기는 방식의 적용. 금은보화의 반출을 넘어 장례용품 전체를 연구 자료로 남긴 조사 기반.

버지니아 울프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평가하던 시기와 댈러웨이 장편 구상기가 겹침. 두 작품의 ‘도시의 하루’ 구조와 인물의 이동·기억·의식 서술은 이후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비교되어 왔으며, 울프의 작품은 조이스의 실험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것으로 논의됨.

원세훈,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개막한 국민대표회의에 노령 한족 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에 가담. 임시정부의 조직과 헌법을 유지하면서 개편하자는 개조파와 대립함.

개조파가 회의에서 이탈한 뒤 창조파는 6월 초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국호를 조선공화국으로 정함. 원세훈과 김규식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창조파 인사들은 새로운 정부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같은 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그러나 이 조직은 소련 정부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해산됨.

김규식 (우사) 국민위원회에 함께 참여한 창조파 인사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부의장에 취임함. 국내외 각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과 진로를 논의함. 진영 간 대립으로 성과 없이 결렬되었으나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통합 시도.

안창호

카나번 경의 『더 타임스』 독점 보도 계약이 이집트와 다른 나라 언론의 접근을 제한하면서 논란이 커진 사건.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국 지위에서 벗어난 직후의 정치적 환경에서 자국 유산의 소식을 외국 신문에 의존해야 한다는 반발이 형성되었으며, 발굴팀과 이집트 당국의 권한 다툼으로 이어진 쟁점.

전실 정리 후 봉인된 문을 열어 왕의 매장실을 확인한 사건. 방의 대부분을 차지한 금박 사당이 드러났으며, 그 안의 석관과 여러 겹의 관을 조사하려면 구조물을 차례로 해체해야 했던 상황. 1922년의 입구·전실 발견에서 왕의 매장 시설 조사로 넘어간 단계.

국내에 흥사단 계열 단체가 두 개로 나뉘어 결성된 사실을 안 안창호가 1923년 3월 이광수를 베이징으로 불러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를 합동하도록 지시.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와 통일적 조직화를 겨냥한 조치. 이 지시가 1926년 두 단체의 통합과 수양동우회 결성으로 이어짐.

발굴 후원자 카나번 경이 카이로에서 사망하면서 무덤에 들어간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소문이 국제 언론에 확산된 사건. 발굴의 흥분과 미라를 둘러싼 기존 대중문학이 결합한 문화 현상이며, 실제 발견되지 않은 저주문까지 보도된 사례. 초자연적 원인을 입증한 고고학적 사실과는 무관한 신화의 형성.

당시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이 주도하여 경상남도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를 창립하고 총본부를 조직. 이는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고 인권 존중과 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적인 한국 최초의 인권 단체라 할 수 있음.

사회주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연맹회’ 주최. 원래 계획은 서울의 각 노동단체와 공장노동자들이 당일 동맹파업을 결의하고 장충단에 모여 ‘노동시간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는 시위행진. 하지만 당시 조선총독부가 장충단으로 모여드는 노동자들을 잡아들여 행사가 열리지 못함. 대신 약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서울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기념 강연을 듣는 것으로 대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