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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가 『개벽』 1922년 5월호에 장편 논설 「민족개조론」을 발표함. 조선 민족의 쇠퇴 원인을 구성원들의 도덕과 성격에서 찾고, 인격 수양·교육·경제적 자립·사회봉사를 통한 전면적 개조를 주장함. 독립보다 민족성 개조와 실력양성을 앞세운 논리로 지식인과 청년층의 강한 비판을 불러온 논설.

이광수 (춘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의 논문 「공간의 곡률에 대하여」가 『Zeitschrift für Physik』에 접수됨. 아인슈타인 장방정식에서 우주의 곡률 반지름이 시간에 따라 증가하거나 주기적으로 변할 수 있는 해를 제시해, 정적 우주만을 가정했던 초기 상대론적 우주론을 넘어 팽창·수축하는 우주가 일반 상대성이론 자체에서 가능함을 보인 성과.

일반 상대성이론

김승학 운영 아래 『독립신문』 상하이 중문판이 1922년 7월 20일 제1호 발행으로 창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중국 사회와 국제 여론에 알리고, 중국인과의 연대를 넓히기 위한 중국어 신문 발간. 국한문판과 병행해 간행되었으며, 1924년 말까지 약 40호 발행.

원세훈,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개막한 국민대표회의에 노령 한족 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에 가담. 임시정부의 조직과 헌법을 유지하면서 개편하자는 개조파와 대립함.

개조파가 회의에서 이탈한 뒤 창조파는 6월 초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국호를 조선공화국으로 정함. 원세훈과 김규식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창조파 인사들은 새로운 정부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같은 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그러나 이 조직은 소련 정부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해산됨.

김규식 (우사) 국민위원회에 함께 참여한 창조파 인사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부의장에 취임함. 국내외 각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과 진로를 논의함. 진영 간 대립으로 성과 없이 결렬되었으나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통합 시도.

안창호

국내에 흥사단 계열 단체가 두 개로 나뉘어 결성된 사실을 안 안창호가 1923년 3월 이광수를 베이징으로 불러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를 합동하도록 지시.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와 통일적 조직화를 겨냥한 조치. 이 지시가 1926년 두 단체의 통합과 수양동우회 결성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