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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가 『개벽』 1922년 5월호에 장편 논설 「민족개조론」을 발표함. 조선 민족의 쇠퇴 원인을 구성원들의 도덕과 성격에서 찾고, 인격 수양·교육·경제적 자립·사회봉사를 통한 전면적 개조를 주장함. 독립보다 민족성 개조와 실력양성을 앞세운 논리로 지식인과 청년층의 강한 비판을 불러온 논설.

이광수 (춘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의 논문 「공간의 곡률에 대하여」가 『Zeitschrift für Physik』에 접수됨. 아인슈타인 장방정식에서 우주의 곡률 반지름이 시간에 따라 증가하거나 주기적으로 변할 수 있는 해를 제시해, 정적 우주만을 가정했던 초기 상대론적 우주론을 넘어 팽창·수축하는 우주가 일반 상대성이론 자체에서 가능함을 보인 성과.

일반 상대성이론

성과가 미미했던 여러 차례의 조사 끝에 카나번 경이 탐사 중단을 고려했으나 카터가 한 시즌을 더 요청한 협의. 카터가 직접 비용을 부담할 의사까지 밝히자 후원자가 추가 지원에 동의했고, 그해 가을의 탐사를 가능하게 한 결정.

김승학 운영 아래 『독립신문』 상하이 중문판이 1922년 7월 20일 제1호 발행으로 창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중국 사회와 국제 여론에 알리고, 중국인과의 연대를 넓히기 위한 중국어 신문 발간. 국한문판과 병행해 간행되었으며, 1924년 말까지 약 40호 발행.

독립신문 상하이판

1922년 10월 28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이 파시스트 검은 셔츠단의 로마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가 준비한 계엄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함. 이 결정으로 루이지 팍타 내각은 무력 대응에 실패하고 총사퇴했으며, 무솔리니의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 공백이 확대됨. 무솔리니 자신은 당시 밀라노에 있었고 30일 로마에 도착해 정부 구성 요청을 받았으므로, 28일 무솔리니가 직접 로마를 점령했다는 기존 서술은 부정확함.

1922년 10월 30일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요청으로 정부 구성에 나선 베니토 무솔리니가 31일 이탈리아의 새 연립내각을 구성함. 로마 진군 이후 정권 교체가 법률상·정치적으로 실현된 단계이며, 10월 28일 계엄령 승인 거부, 30일 총리 임명·정부 구성 요청과 날짜를 구분해야 함.

김명순이 『개벽』 제28호에 에드거 앨런 포의 시 「대아」와 「헬렌에게」를 한국어로 번역해 발표.

김자경은 「헬렌에게」를 구리야가와 하쿠손의 일본어 번역과 비교해, 영어 원문과 다른 표현 일부를 일본어 번역의 영향으로 해석. 두 연을 하나로 합치는 등 원문과 일본어판에 없는 형식 변화에도 주목

김명순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를 폐지하여 술탄의 세속적 통치권을 끝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립전쟁과 앙카라 정부 수립을 거친 제도 전환이며, 마지막 술탄 메흐메트 6세의 퇴장, 1923년 공화국 선포, 1924년 칼리파제 폐지로 이어짐. 술탄제 폐지와 칼리파제 폐지는 서로 다른 사건임.

카터가 지휘한 이집트 발굴팀이 람세스 6세 무덤 인근의 고대 작업자 오두막 아래에서 암반에 파인 계단의 첫 단을 확인한 발견. 오랫동안 잔해 아래 가려져 있던 투탕카멘 무덤의 입구를 찾은 단계이며, 다음 날 봉인된 문 확인과 같은 달 26일 전실 관찰로 이어진 출발점.

계단을 따라 내려간 발굴팀이 회반죽으로 봉인된 출입구의 윗부분과 왕실 묘지 인장을 확인한 단계. 아직 무덤 주인의 이름은 판독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카터는 발견 지점을 다시 보호하고 카나번 경의 도착을 기다리기로 한 조치.

발굴팀이 열여섯 계단과 첫 출입구 전체를 드러내면서 투탕카멘의 왕명이 찍힌 봉인을 확인한 단계. 문 윗부분에는 이전에 뚫었다가 다시 막은 흔적도 남아 있어, 완전히 손대지 않은 무덤이라는 최초의 기대와 고대 도굴의 증거가 함께 드러난 발견.

11월 26일의 첫 내부 관찰 이후 지방 관리와 초청객이 참석한 공식 개방 행사. 전실의 유물과 발견 성과가 외부에 소개되고 언론의 관심이 확대되었으나, 좁은 공간에 밀집한 취약한 유물 때문에 관람 접근과 보존을 조정해야 했던 출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