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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9년의 기록 66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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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A 시험비행사 허버트 H. 후버가 X-1 2호기로 마하 1.029에 도달함. 군 조종사였던 척 예거의 성과에 이어 NACA와 민간 시험비행사에게도 첫 초음속 비행이 되었음.

2호기는 단순히 같은 기록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회·옆미끄럼·승강타 효율 등 조종과 안정성 자료를 수집하는 연구에 사용됐음. 이 조종사는 동명의 미국 대통령과 다른 인물임.

벨 X-1

쿠바 아바나의 유엔 무역고용회의에서 국제무역기구(ITO) 설립을 위한 헌장 문안을 확정한 사건. 상품 거래뿐 아니라 고용·경제개발·투자 등까지 다루려던 전후 국제경제 협력 구상.

헌장 문안을 채택하는 것과 각국이 이를 받아들여 실제 기구가 출범하는 것은 별개의 절차. 헌장은 끝내 발효하지 못했으며, 이미 잠정 적용 중이던 GATT가 상품무역 규칙을 운영하는 중심 틀로 남게 된 배경.

척 예거가 X-1 1호기를 조종하여 이 기체의 최고속도인 마하 1.45에 도달함. 1947년의 음속 돌파 이후에도 1호기가 더 높은 속도에서 안정성과 조종성을 조사하는 시험을 이어갔음을 보여 주는 비행이었음.

후속 X-1 계열의 마하 2 이상 기록과는 구분되는 초기 1호기의 성과임.

벨 X-1

새벽 2시, 남로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 또한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

세계보건기구 설립한 날을 세계 보건의 날 (World Health Day)로 지정. 매년 전 세계 핵심적인 보건 문제를 선정, 이를 위해 한 해 동안 국제적, 지역적, 지방적 행사를 조직하기 위해 제정.

1948년 4월 19일부터 열리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으로 향함. 회의 뒤 김구, 김규식 등이 5월 초 서울로 돌아온 것과 달리 이극로는 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북에 잔류함. 이로써 평생을 바친 한글운동의 무대를 남에서 북으로 옮긴 전환점.

게토 봉기 5주년에 바르샤바의 옛 게토 지역에서 게토 영웅 기념비가 제막됨. 나탄 라포포르트의 조각은 무장 저항과 강제이송의 경험을 서로 다른 면에서 드러냄.

이 기념비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대인의 저항을 기억하는 중심 장소가 됨. 이후 생존자와 시민의 추모, 국제적인 방문과 화해의 상징적 행동이 이어짐.

바르샤바 게토 봉기

김규식, 1948년 4월 21일 원세훈 등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이동.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전체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김구·김일성·김두봉과 남북 지도자 회담을 진행하며 남북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협의함.

남북 지도자들은 외국군 철수, 철수 이후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내전 방지 등에 합의했으나 이를 실행할 제도적 수단을 마련하지 못함.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으며, 남북협상은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분단에 반대한 정치세력의 대표적인 통일정부 수립 시도로 남음.

김규식 (우사)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무장대에 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보도의 ‘지난 22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항공 살포일을 4월 22일로 정리한 내용.

《남선신문》 5월 3일자 《靈峰漢拏의 死火山鳴動》 역시 약 일주일 동안 산기슭 일대에 수차례 전단을 뿌렸으며, 향토의 평화 회복을 위해 손을 잡자는 취지의 김익렬 연대장 전단이 다시 살포됐다고 보도한 기록. 이 기사의 5월 3일은 발행일이고 머리말의 통신 발신일은 5월 2일로, 전단 살포 당일과 구분되는 날짜. 협상 권고와 귀순 요구가 이어진 과정에 관한 당시 보도.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이 대정면 구억리에서 만나 무력 충돌의 중단과 무장대의 하산 방안을 협의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와 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가 1948년 4월 28일로 정리한 회담.

김익렬의 회고를 인용한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합의의 주요 내용은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산발적 충돌은 연락 미달로 간주하되 ‘5일 이후’의 전투는 약속 위반으로 보며, 무장해제는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약속이 깨지면 전투를 재개하며,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내용. 귀순 절차는 회담 다음 날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수용소를 설치하고 서귀포·성산포 등으로 확대하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하는 구상. 서명된 합의문 원본이 아니라 김익렬의 회고에 따라 전해지는 구체 조항.

회담 뒤에도 납치·살해와 5월 1일 오라리 방화, 군정 수뇌부의 공격 방침 등이 이어지며 지속적인 충돌 중단으로 연결되지 못한 협상. 한편 박찬식의 연구는 1948년에 작성·발표된 김익렬의 《참전기》에 회담일이 4월 30일로 적혔다고 지적한 내용으로, 공식 연표의 4월 28일과 날짜 기록의 차이가 남아 있는 사건.

이들은 이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기록. 당시 오라리 지역은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과 좌익 무장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곳. 이 방화사건은 평화회담을 깨고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무장대 측과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 단체의 충돌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피해를 양산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기록.

당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거주하던 대동청년단 단원의 부인 2명은 마을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제주시 읍내로 피신. 이들은 살림살이를 챙기기 위해 잠시 마을로 다시 들어왔다가, 이를 인지한 마을 주민들(무장대 동조 세력)에 의해 납치. 마을 뒷산인 민오름으로 끌려가 이 중 1명은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