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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9년의 기록 66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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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호퍼가 이끄는 하버드 마크 II 운영팀에서 하버드 대학교 계산 연구소 마크 II의 릴레이(Relay) #70 (패널 F) 사이에 끼어 컴퓨터 고장을 유발하던 나방을 발견하고 "First actual case of bug being found"라고 기록. 이후 이 일화를 자주 언급하여 버그, 디버깅이라는 용어가 업계에 널리 퍼짐.

샘 닐이 북아일랜드 오마에서 나이절 존 더멋 닐(Nigel John Dermot Neill)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남. 아버지는 뉴질랜드인, 어머니는 영국인이었으며 아버지는 당시 영국군에서 복무하고 있었음.

어린 시절 '나이절'이라는 이름 대신 '샘'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배우로서도 샘 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함.

1947년 10월 5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최초의 대통령 텔레비전 연설을 함.

트루먼은 시민식량위원회 프로그램의 마지막 순서로 미국 국민에게 전후 유럽의 식량 부족을 돕기 위한 절약을 호소함. 백악관에서 대통령 연설이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최초의 사례로, 대통령의 대국민 커뮤니케이션이 라디오 중심에서 텔레비전 시대로 이동하는 상징적 사건.

한글날에 맞춰 『조선말 큰사전』 1권을 펴냄. 1929년 편찬회 조직 이후 18년 만에 나온 첫 결실로, 우리 민족의 손으로 만든 첫 한국어 대사전의 출발. 이후 1949년 2권이 이어지고 학회 개칭 뒤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완간됨.

미국 워싱턴에서 세계기상기구협약에 서명하고 정부간 기상협력을 위한 법적 토대 마련. 관측망·정보교환·표준화·연구·교육훈련에 관한 국제 협력을 기구의 목적에 두고, 비정부적 IMO에서 정부간 WMO로 이행하기 위한 설립 절차 개시.

미국의 시험비행사 척 예거가 로켓 추진 실험기 벨 X-1을 조종하여 마하 1.06에 도달하며 통제된 유인 수평비행에서 최초로 음속 돌파에 성공함. 당시 기체는 미국 육군항공대에서 출범한 미 공군의 시험비행에 사용되었으며, 캘리포니아 머록 시험기지 상공에서 비행함.

압축성 공기역학과 고속 항공기 제어의 기술적 한계를 검증한 성과로, 이후 초음속 항공기 및 항공우주 연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됨.

벨 X-1

23개국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서명한 사건. 외국 상품에 붙이는 세금인 관세를 낮추는 약속과, 교역 상대국을 부당하게 차별하지 않는 규칙을 함께 마련한 전후 국제무역 협력의 출발점.

당초 상설 국제무역기구가 출범할 때까지 사용할 임시 협정이었으나, 그 구상이 실현되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무역규칙 운영을 담당한 체제. 서명한 이날과 실제 잠정 적용이 시작된 1948년 1월 1일은 서로 다른 단계.

김규식·원세훈·안재홍·홍명희 등 중도파 인사들,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선출. 좌우합작위원회와 미소공동위원회 대책협의회 등 기존 중도파 조직을 통합해 극좌·극우의 대립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 결성을 추진함.

김규식 (우사)

미국 항공기 개발자 하워드 휴스가 캘리포니아 롱비치 인근 해상에서 초대형 수송 비행정 H-4 허큘리스를 직접 조종해 최초이자 유일한 짧은 시험비행을 실시함.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수 수송을 위해 개발됐지만 전쟁 후 완성됐으며 양산되지 않음. 대형 항공기 기술과 정부 계약 개발사업의 역사적 사례.

미국 NBC 방송망이 1947년 11월 6일 정치 인터뷰 프로그램 《미트 더 프레스》(Meet the Press)의 첫 텔레비전 방송을 송출함. 마사 라운트리가 진행한 첫 방송에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체신부 장관을 지낸 제임스 A. 팔리가 게스트로 출연함. 1945년 라디오에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정치인을 직접 대면하여 질문하는 텔레비전 저널리즘의 초기 사례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장수 시사 프로그램으로 발전함.

중도 좌·우파 정당과 사회단체·개인들이 참여한 민족자주연맹, 1947년 12월 20일 서울 천도교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추대.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 독재를 모두 배제하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결합한 중도 노선을 표방.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지도자 회담과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며 이듬해 남북협상의 정치적 기반으로 기능함.

김규식 (우사) 초대 위원장